대기업들이 무분별한 사업 확장 논란에 휘말렸던 중소기업·소상공인 업종에서 잇따라 철수를 선언하고 나섰다. “대기업그룹 2, 3세들이 연이어 베이커리·카페 사업에 진출하며 동네 빵집이 피해를 보고 있다”는 비판 여론이 높아진 데다 총선을 앞둔 정치권도 이를 문제 삼기 시작한 데 따른 것이다.
호텔신라는 26일 자회사 보나비를 통해 운영하고 있는 베이커리·카페 사업 ‘아티제’에서 손을 뗀다고 발표했다. 사업 철수의 구체적 방식과 아티제 종업원의 고용을 호텔신라가 승계할지는 정해지지 않았다. 호텔신라 관계자는 “보나비 지분을 사회공익재단에 기부하거나 종업원에게 나누어 주는 등 다양한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호텔신라는 ‘아티제 블랑제리’의 지분도 정리하기로 했다. 호텔신라는 홈플러스가 최대주주인 이 회사에 기술 지도를 해주고 브랜드를 빌려주는 대가로 19%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 “대기업이 동네 빵집과 경쟁” 눈총… 재벌 딸들 줄줄이 손떼나 ▼
아티제는 서울과 충남 천안시 삼성전자 공장 등에 27개 매장을 운영 중이다. 지난해 호텔신라 전체 매출의 1.4%에 해당하는
241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 종합식품기업 아워홈도 이날 순대·청국장 사업에 대해 ‘기업과 소비자 간 거래(B2C)’ 시장에서
철수한다고 밝혔다. 동반성장위원회가 지난해 순대·청국장 사업을 중소기업 적합 업종으로 선정하자 내부 검토를 거쳐 사업을 중단하기로
한 것이다.
○ 상생 요구 여론에 재계 ‘화답’
호텔신라는 “아티제는 오너 일가가 지분을 갖고 있지 않고,
오피스빌딩에 주로 입점해 있어 골목상권 침해와 거리가 멀지만 상생경영을 적극 실천하는 차원에서 사업 철수를 결정했다”고 밝혔다.
도덕적 문제는 없지만 ‘삼성이 동네 빵집과 경쟁한다’는 불필요한 오해를 불식하기 위한 대승적 차원의 결정이라는 주장이다. 아워홈
측도 “사업 철수로 그동안 투자해온 최신 설비 및 영업에 대한 손실이 불가피하지만 상생협력에 적극 동참하려는 것”이라는
입장이다. 호텔신라와 아워홈의 사업 철수는 사회적인 공생발전 요구에 대한 재계의 화답인 셈이다. 호텔신라와 아워홈은 지난해부터
이들 사업의 중단을 내부적으로 검토해왔다. 하지만 이들이 공교롭게 같은 날 사업철수 발표를 한 데에는 총선을 앞두고 청와대가
적극적으로 민생 챙기기에 나선 것이 영향을 끼쳤다는 분석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전날인 25일 청와대에서 열린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전반적으로 경제가 어려운 때에 대기업그룹 2, 3세들이 소상공인들의 생업과 관련한 업종까지 사업 영역을 넓히는
것은 자제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또 이 대통령은 “공직자와 노동자에게 공직윤리, 노동윤리가 있듯이 이는 기업의 윤리와
관련된 문제”라며 대기업 2, 3세들이 어떤 영역에 진출해 있는지를 파악해 보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 롯데·신세계 ‘고심’
호텔신라가 이부진 사장이 직접 챙겨온 아티제 사업을 접기로 하면서 비슷한 사업을 하고 있는 다른 대기업그룹도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의 외손녀 장선윤 씨가 대표인 블리스는 현재 서울 롯데백화점 본점과 잠실점 등 7곳에 베이커리카페
‘포숑’을 운영하고 있다. 이명희 신세계 회장의 외동딸 정유경 신세계 부사장이 40%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조선호텔베이커리도
‘데이앤데이’와 ‘달로와요’ 브랜드로 각각 118곳과 10곳의 점포를 운영 중이다. 그간 이들 베이커리와 아티제의 경쟁은
‘대기업그룹 오너 딸들의 빵집 전쟁’으로 관심을 끌어왔다.
블리스는 부정적 여론을 의식해 한때 12곳에 이르렀던
포숑의 매장 중 5곳의 문을 이미 닫았다. 롯데그룹 관계자는 이날 호텔신라의 발표에 대해 “상황을 주시하고 있지만 아직 결정된
것은 없다”고 말했다. 신세계는 “데이앤데이와 달로와요는 이마트와 신세계백화점 내에 위치해 골목상권 침해 논란과는 관계가 없다”고
강조했다.
○ “유통·서비스 분야 대기업 철수 늘 것으로 전망”
유통·서비스 등 대기업의 무분별한 확장이 문제가 됐던 다른 업종에서도 이 같은 움직임은 확산될 것으로 보인다. 동반성장위원회는 지난해 제조업 분야에 이어 올해 유통·서비스 분야의 중소기업 적합업종 선정을 추진 중이다.
서비스업의 경우 제조업과 달리 대기업이 이미 상당 부분 장악했거나 프랜차이즈가 보편화된 분야가 많아 적합업종 선정 과정에서
진통이 예상된다. 예컨대 CJ그룹은 외식사업을 통해 비빔밥 전문점 ‘비비고’를 운영 중이고 롯데그룹도 커피전문점 ‘엔제리너스’를
운영 중이다. 프랜차이즈 가맹점의 경우 대기업 혹은 중견기업인 본부의 영업방침을 따르지만 소유·운영권은 일반 점주들이 갖고 있어
기업규모 구분도 어렵다. 하지만 중소기업과 영세 자영업자의 영역에서 대기업이 발을 빼야 한다는 여론을 감안하면 이들 분야에서도
대기업이 일정 부분 사업 중단 등 양보를 할 가능성이 높다.
전성철 기자 dawn@donga.com 김승련 기자 srkim@donga.com 김현지 기자 nu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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