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혼 전셋집을 구하지 못해 무능한 남자친구로 보이는 처지가 답답합니다." "용돈을 아껴가며 대비를 했지만 터무니없이 오르는 전세금에 집에서 쫓겨나듯 이사해야 하는 심정을 정부가 알아야 합니다."
"외환위기 때보다 상황이 심각한 데 정부가 제대로 알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지난해부터 이어지고 있는 전세난에 고통 받고 있는 서민들의 비명에 가까운 증언들이다. 이들은 한목소리로 정부가 쏟아내는 전세대책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며 보다 현실적인 보완책 마련을 요구했다. ● 살집 못 구해 결혼 늦춘 예비부부 서울 중구 명동에 사무실을 둔 중소업체에 다니는 송모 씨(28). 그는 얼마 전 결혼을 약속한 여자친구와 크게 다퉜다. 11월초에 결혼하기로 예식장까지 정했지만 신혼살림을 차릴 전셋집을 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송 씨는 "결혼날짜를 미루고, 신혼집을 전세에서 월세로 바꿔 찾자고 했더니 여자친구가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았다"며 "전셋집을 제대로 구하지 못해 여자친구나 예비 장모님께 능력 없는 사람으로 비춰지는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며 우울해했다.
송 씨가 전셋집을 구하기 시작한 것은 전세난이 절정이었던 올해 1월부터. "부모님의 도움 없이 내가 살 집은 내가 마련한다"는 생각에 은행대출까지 합쳐 5000만 원을 마련했다. 하지만 턱없이 부족한 돈이라는 걸 깨닫는 데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 정도 액수로는 서울에서 소형 아파트는커녕 원룸 오피스텔도 구할 수도 없었다. 강남구 전역은 엄두도 낼 수 없었고, 동작구와 관악구 일대를 샅샅이 뒤졌지만 대부분 1억 원을 훌쩍 넘거나 싼 곳도 7000만~8000만 원 이상을 요구했다. 강서구에 사무실이 있는 예비 아내의 출퇴근을 고려해 교통망이 닿을 수 있는 일산신도시와 안양지역도 알아봤지만, 그곳에서도 두 사람이 마음에 드는 집의 전세금은 최소 6000만 원이 넘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전세금이 싼 곳을 찾아 경기 외곽지역으로 갈 수도 없었다. 출근이 두 시간 이상 걸리기 때문이었다.
결국 송 씨는 여자친구를 설득해 전세를 포기하고 월세로 집을 구하기로 했다. 더 이상 늦춰봐야 전세금이 떨어질 가능성이 없어 보이자 여자친구도 받아들였다. 결혼날짜도 12월 중순으로 늦췄다. 송 씨는 "그동안 쏟아낸 정부 대책이 효과를 거두지 못해 전세금 상승세가 계속되고 있는 만큼 정부가 보다 실효성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 전세금 부담에 회사 근처 집 떠난 직장인 분당신도시에 있는 사무실이 있는 건설회사에 다니는 이모 팀장(42)은 그동안 회사 근처아파트에 전세로 살다 올해 5월 서울 동대문구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U턴'했다. 2년 새 8000만 원이나 뛴 전세금을 감당하지 못한 탓이다. 덕분에 걸어서 다니던 출근길이 1시간30분 이상 차를 타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 팀장은 외식비, 기름값 등을 아껴서 적금을 모아가며 나름대로 대비를 했지만 예상을 뛰어넘는 전세금 상승에 결국 두 손을 들었다. 이 팀장은 "서울에 직장을 두고 전세를 살던 집주인도 오른 전세금을 보충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올려야만 했다고 말해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며 "2년 사이 8000만 원을 만든다는 건 평범한 직장인에게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또 "직장인들이 선호할 수 있는 일부 인기 지역들을 중심으로 주택수급 문제가 오래 전부터 지적됐는데도 정부 대책이 마련되지 않고 있다"며 "정부가 현장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 뚝 끊긴 거래에 한숨 쉬는 중개업자 "최근 한 달 동안 계약 한 건도 성사를 못 시켰어요. 파리만 쫓았어요." 4일 서울 마포구 도화동에 있는 H공인중개사 대표 조모 씨는 사무실을 찾은 동아일보 기자에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자리에서만 15년 공인중개사로 일해 온 조 씨는 "1998년 외환위기 때보다 더 힘들다"고도 했다. 또 "일대에서 비교적 위치가 좋은 곳에 자리 잡은 우리 사무실이 이런 상황인데 골목안쪽에 쑥 들어갔거나 규모가 작은 사무실은 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조 씨는 진단한 원인은 전세금의 비정상적인 상승에 있다. 인근에 위치한 전용 84㎡ 아파트의 전세금이 올해 들어서만 평균 3000만 원이 올랐고, 입주한 지 2년 미만인 새 아파트는 4000만~5000만 원까지 뛰었다. 조 씨는 "이곳에서 공인중개사무실을 차린 이래 이렇게 전세가 빠르게 오른 걸 본 적이 없다"며 "가격이 너무 올라 신혼부부 등 젊은 사람들이 집을 구하지 못하고 돌아서는 걸 보면 안타깝다"고 전했다. 그는 "정부가 '반값 아파트'라며 보금자리 주택을 쏟아내자 무주택 실수요자들이 청약기회를 기다리며 집을 사지 않고 전세로 눌러 앉으면서 이런 현상이 생겼다"며 "정부의 보완방안 마련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이건혁 기자 realist@donga.com 염유섭 인턴기자·서울시립대 국어국문학과 4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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