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기업 유혹하는 브로커들, 본보기자가 상담 받아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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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5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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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에 페이퍼컴퍼니 하나 만드시죠”


“홍콩에 페이퍼컴퍼니(서류상 회사)를 세우면 세금을 안 내도 된다고요?”

“네, 송장(무역거래 서류)만 잘 쓰면 회사의 매입, 매출, 이윤을 사장님 마음대로 조절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세금을 사실상 원하는 만큼만 낼 수도 있습니다.”

“자금 운용도 훨씬 편해진다는데 구체적으로 돈을 어떻게 굴릴 수 있다는 겁니까. 제 신분을 숨기고 회사를 만들 수도 있습니까?”

“한국에서 사장님이 인터넷 뱅킹으로 홍콩에 세운 페이퍼컴퍼니의 계좌에 든 돈을 쉽게 제3국으로 보낼 수 있습니다. 저희가 회사의 주주나 이사 역할도 대신해 드리기 때문에 사장님이 회사의 실소유주라는 사실은 아무도 모르게 할 수 있습니다.”

기자가 6일 홍콩에 본사를 둔 페이퍼컴퍼니 설립 대행사 소속 브로커와 국제전화로 나눈 상담내용이다. 동아일보 취재 결과 이런 브로커들이 국내 기업 관계자 등을 상대로 ‘세(稅)테크’와 ‘자금운용’에 좋다면서 홍콩에 페이퍼컴퍼니를 세울 것을 권유하는 광고 메일을 무차별로 뿌리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 “세금 원하는 만큼만”의 유혹

페이퍼컴퍼니는 말 그대로 사무실, 직원 등 물리적 실체는 없이 서류상에만 존재하는 회사를 뜻한다. 최근 대법원이 홍콩 등에 페이퍼컴퍼니를 차려놓고 자사 선박을 이 회사로 넘겨서 선박 임대수입 등에 대한 세금 납부를 피해 왔던 국내 선박회사의 대표에게 수천억 원의 세금을 부과한 국세청 처분이 적합했다는 판결을 내리면서 관심이 높아졌다.

법인 설립 대행업체 브로커들은 홍콩에 법인이 있으면 △외환관리법이 없기 때문에 자금을 무제한 입출금할 수 있고 △한국보다 법인세율 등이 낮아 합법적 절세가 가능하며 △회사 실제 소유주의 신분을 감출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유혹하고 있다.

홍콩은 전통적으로 법인 설립절차가 간편하고 외화거래 규제도 까다롭지 않아서 버진아일랜드, 케이맨 제도 등과 함께 ‘페이퍼컴퍼니의 천국’으로 불린다. 홍콩 내에서도 ‘속빈 조개 회사(空殼公司)’라는 별명까지 있을 정도다. 실체 없는 회사라는 뜻이다.

설립 자체는 합법적이고 실제로 절세 효과도 일부 있기 때문에 현지에는 페이퍼컴퍼니 설립을 대신해주는 업체들도 있고 일부는 페이퍼컴퍼니의 주소지와 연락처 등을 제공하는 ‘버추얼(Virtual) 오피스 서비스’도 성업 중이다.

문제는 일부 대행업체나 소속 브로커들이 탈세나 자산도피, 비자금 조성에 유리하다고 암시하는 홍보 방식으로 국내 기업 관계자들을 유혹한다는 사실이다. 앞서 소개한 브로커와의 상담 내용처럼 명목상으로는 ‘절세나 자금운용의 원활성’을 내세우면서도 자산도피나 돈세탁 등이 가능하다는 점을 은밀하게 암시하는 것.

전효찬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국내 외환관리법은 기업의 정상 무역거래에 지장을 줄 정도로 까다롭지는 않고, 다만 개인의 거액 외화 송금을 제한하는 수준”이라며 “외국에 거액의 자금을 예치하려는 개인이 정상 무역거래를 가장하는 수단으로 페이퍼컴퍼니를 활용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KOTRA 홍콩지사 관계자도 “홍콩은 영국령 버진아일랜드 등 조세도피처와 자금 교류가 많은데, (홍콩 소재 페이퍼컴퍼니와) 이들 지역이 연계된 돈세탁, 탈세가 이뤄질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 세무당국도 긴장

상품가치가 없는 상품을 페이퍼컴퍼니로부터 수입하고 물품대금 명목으로 외환을 송금하는 방식도 페이퍼컴퍼니를 활용한 대표적인 자산도피 수법이다. 한창령 관세청 외환조사 과장은 “일단 송금을 마친 뒤 ‘물건에 하자가 있다’며 반송하고 수입을 몇 차례 반복하다 보면 거액의 자산을 쉽게 해외로 유출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받지도 않은 경영자문을 페이퍼컴퍼니가 해 준 것처럼 서류를 꾸며 거액의 자문료를 지불하고 이 돈을 다시 외국인 직접투자금인 것처럼 국내에 들여와 회삿돈을 비자금으로 만들기도 한다.

홍콩의 페이퍼컴퍼니가 자산도피 및 돈세탁의 통로로 이용되는 사례가 늘면서 당국도 긴장하고 있다. 관세청에 따르면 홍콩 관련 자금세탁, 재산도피 등 불법외환거래 단속 금액은 지난해 5563억 원에 달했다. 2008년(4228억 원)과 2009년(2321억 원)보다 크게 증가한 수치다. 관세청은 지난달 27일 홍콩 관세청 외환조사 수사요원을 초청해 홍콩의 페이퍼컴퍼니 설립·운영 방식과 조세피난 수법 등에 대해 설명을 듣고 공조수사 강화를 위한 세미나를 열기도 했다.

우정렬 기자 passion@donga.com  
박승헌 기자 hpark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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