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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8년 6월 5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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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은행 - 기업들 수익 욕심이 화 불러”
《3월 이후 외환시장 참가자들의 예상과 달리 원-달러 환율이 급등(원화가치는 하락)하면서 환 헤지를 위해 통화옵션 상품에 가입했던 수출업체들의 피해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 금융감독원은 4일 “국내외 은행들을 대상으로 통화옵션 거래 현황을 파악한 결과 5월 16일 현재 16개 기업이 통화옵션 상품 중 하나인 ‘스노볼 옵션’ 거래에서 약 2000억 원의 손실(평가손실 포함)을 봤다”고 밝혔다. 얼마 전 또 다른 통화옵션 상품인 ‘녹인·녹아웃(KIKO) 옵션’으로 인한 수출업체들의 환차손이 최대 1조 원을 웃돌 것으로 추정된 가운데 또 다른 통화옵션 상품인 ‘스노볼’이 ‘폭탄’으로 떠오른 것이다. 제3, 제4의 폭탄이 나올 가능성도 있다.》
이번 사태는 기업들이 파생상품을 ‘위험회피’를 넘어서 ‘투기용’으로 이용한 측면과 위험요인에 대한 충분한 설명도 없이 파생상품을 팔아 이윤 챙기기에 급급했던 금융회사들의 관행이 결합돼 발생한 파국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 꼬리 무는 환헤지 손실
상당수 국내 중소 수출업체들은 최근 2, 3년간 은행들과 수출 대금의 환 위험을 피할 목적으로 각종 통화옵션 계약을 해 왔다.
수출업체는 선물환을 매도하면 간편하게 환 변동에 따른 위험(원화 가치 하락)을 피할 수 있지만 수수료가 있고 달러 값이 선물환 계약시점보다 오를 경우엔 시가(時價)보다 낮은 가격에 달러를 팔아야 하는 ‘억울한’ 측면이 있다.
이에 비해 통화옵션 파생상품을 잘 활용하면 수수료 없이 헤징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또 만기일의 환율이 일정 범위에 있다면 유리한 가격으로 달러를 팔 수도 있어 환차익까지 얻을 수 있다. KIKO나 스노볼 옵션은 이런 통화옵션을 특정한 방식으로 결합한 환헤지 상품들.
문제는 이런 통화옵션 상품은 환율이 예상과 달리 특정 범위를 벗어나면 기업이 달러를 시장가격보다 낮은 가격으로 은행에 팔아야 한다는 데 있다. 수출업체는 상품을 팔아 벌어들인 달러보다 더 많은 금액을 울며 겨자 먹기로 외환시장에서 추가로 사서 더 싼 가격에 팔아야 하기 때문에 막대한 손해를 보게 된다.
○ 중소기업 소송 준비, 정부는 불공정 거래 조사
4일 현재 중소기업중앙회에 접수된 피해 사례는 114개 업체의 1453억 원에 이른다.
이에 따라 중소기업 120여 회사는 ‘환 헤지 피해기업 공동대책위원회’를 결성하고 “KIKO 등 통화옵션 상품의 불공정성에 대해 공정거래위원회에 제소할 것”이라며 “은행을 대상으로 소송할 것인지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공정거래위원회도 “중소 전자업체인 T사 등이 지난달 21일 일부 은행이 통화옵션 상품을 파는 과정에서 공정거래법과 약관 법을 위반했다고 신고해온 만큼 사실 여부를 조사할 것”이라고 밝혔다.
수출업체들은 “은행들이 통화옵션 상품이 얼마나 위험한지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고, 일부 강압적으로 계약을 맺는 등 불공정 거래 행위가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 기업과 은행의 탐욕이 부른 결과
수출업체들이 간단히 환 변동의 위험을 피할 수 있는 ‘선물환 거래’를 선택하지 않고 통화옵션 계약을 맺은 것은 실리 때문이었다.
시중은행의 한 관계자는 “일부 중소기업은 KIKO에 가입한 뒤 환율이 떨어졌을 때 벌어들인 돈이 영업이익의 몇 배가 됐다”고 말했다. 은행들도 통화옵션 거래를 통해 많은 수익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은행들은 “통화옵션 상품이 사적 거래인 만큼 문제 될 것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파생상품 전문가들은 “시중은행들이 영업을 위해 정보가 부족한 중소기업에 환율이 지속적으로 떨어질 것이라고 지나치게 한 방향으로 몰고 가지는 않았는지 반성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일부 중소기업은 소송까지 준비하고 있어 기업과 은행, 어느 쪽이 더 많은 법적 책임을 져야 하는지는 법정에 가서야 가려질 것으로 보인다.
이나연 기자 larosa@donga.com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녹인·녹아웃(KIKO)과 스노볼 옵션
달러를 미래 시점에 팔 권리인 ‘풋 옵션’과 살 권리인 ‘콜 옵션’이 결합된 통화옵션 상품. 수출 기업은 이들 옵션을 사면 환율이 정해진 범위 내에 머무는 동안에는 환 변동 위험을 피할 수 있다. 그러나 환율이 이 범위를 벗어나면 시장 가격보다 싼 가격에 2배 이상의 달러를 의무적으로 팔아야 한다. 단, KIKO 옵션은 계약 당시 ‘파는 가격’이 정해지지만 스노볼 옵션은 환율이 오를수록 ‘파는 가격’이 더 낮아지는 구조여서 수출기업의 손실이 더 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