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글로벌사태로 본 실상]'종합상사시대' 저무나

  • 입력 2003년 3월 13일 18시 3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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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글로벌 분식회계 사건을 계기로 국내 종합무역상사들의 불안한 수익구조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SK글로벌이 분식회계를 꾀한 직접적인 원인은 수출실적이 나빠지면서 생긴 부실을 감추기 위해서이다. 70, 80년대 정부가 수출 드라이브 정책을 펼칠 당시 그룹 계열사의 무역업무를 대행하며 수수료 수입을 챙겼던 종합상사들은 80년대 중반 이후 계열사들이 자체 수출망을 마련하자 타격을 입기 시작했다. 상당수 종합상사들은 타개책으로 해외투자에 나섰다가 오히려 부실의 수렁에 더욱 깊게 빠졌다.

▽수출업무의 한계〓전문가들은 정도만 달랐을 뿐이지 대다수 종합상사들의 경영 상태가 불안한 것으로 보고 있다. SK글로벌은 97년과 99년 이미 두 차례에 걸쳐 현금흐름이 마이너스를 기록했으며 2001년 1220억원의 당기순손실을 냈다. 현대종합상사는 지난해 완전 자본잠식상태에 빠졌다. 지난해 잔여 자본금이 1110억원이었는데 당기순손실 등 1617억원 손실분을 회계에 반영한 결과 실제 자본금이 마이너스 507억원으로 떨어진 것이다.

이처럼 종합상사들의 경영이 악화된 것은 본연의 업무인 수출 사업이 크게 위축됐기 때문. 90년대 말 그룹 계열분리와 경제위기 등이 겹치면서 종합상사들이 총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98년 52%에서 지난해 37%로 떨어졌다. 종합상사들의 수출실적이 크게 악화되자 정부는 지난해 ‘총수출액에서 차지하는 상사의 수출비중이 2% 이상일 것’이라는 종합상사 지정요건을 폐지하는 등 기준을 완화하기도 했다.

종합상사들은 수출대행 사업이 축소되자 플랜트 수출과 삼림 유전 개발 등 해외 직접투자에 나섰으나 이마저 대부분 실패로 돌아갔다. SK글로벌 관계자는 “이번 분식회계의 직접적인 원인은 80년대 말 인도네시아 공단 개발에 나섰다가 발생한 손실을 털어버리지 못하고 계속 쌓아왔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종합상사의 원조 격인 일본의 미쓰비시상사와 미쓰이물산도 매출이 크게 축소됐으며 니쇼이와이 물산, 도멘 상사 등은 거의 증시에서 퇴출될 위기에 놓여 있다.

▽내수사업 다각화〓종합상사들이 새로운 수익원을 찾아 내수시장으로 눈을 돌리는 추세다. 상사 부문에서는 2004년까지 손실이 예상되는 삼성물산은 국내 건설과 주택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현재 삼성물산의 가장 중요한 존립근거는 ‘래미안’ 아파트이다.

LG종합상사도 닥스 등 패션의류 유통에 주력하고 있으며 일본 캐논 카메라 수입 판매에까지 손을 뻗치고 있다. SK글로벌은 에너지 판매, 정보통신기기 유통, 외제자동차 수입 등 내수에서는 알짜 사업이 많지만 수출부문에서는 손실이 계속되고 있다.

무역협회의 김극수 박사는 “종합상사들이 국내에서 수입원 다각화에 노력하고 있으나 해외투자 실패 등으로 발생한 손실을 쉽게 보전할 수 없기 때문에 당분간 어려움이 지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종합상사 수출액과 비중 추이
연도수출액(억달러)수출 비중(%)
1998년66851.9
1999년73651.2
2000년81247.2
2001년56337.4
2002년 1∼5월23637.3
수출비중은 해당연도 전체 수출액에서 차지하는 비중. 자료:무역협회

정미경기자 mickey@donga.com

▼전경련 회장 '정권과 악연' ▼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을 맡은 게 최대 실수였다.”

분식회계 및 경영비리 혐의로 99년 10월 출국, 3년 넘게 해외도피 생활 중인 김우중(金宇中) 전 전경련 회장(당시 대우그룹 회장)은 지난해 말 모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전경련 회장을 맡고 마치 경제대통령이나 된 것처럼 우쭐해졌다”며 착잡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김 전 회장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하더라도 90년대 이후 전경련 회장의 위상이 떨어지고 정권과의 관계도 악화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김 전 회장에 앞서 93년부터 6년간 전경련 회장을 맡았던 고(故) 최종현(崔鍾賢) 당시 선경그룹 회장은 사돈인 노태우(盧泰愚)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과 관련해 검찰 소환 조사를 받았다. 당시 최 회장은 노 전 대통령에게 30억원의 비자금을 제공한 혐의로 다른 재벌그룹 총수들과 함께 검찰 조사를 받았으나 공소시효 만료로 사법처리 대상에서 제외됐다.

정권과의 악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지난달 전경련 회장에 취임한 손길승(孫吉丞) SK 회장도 취임한 지 한 달도 안 돼 SK그룹 분식회계 혐의 등과 관련해 최근 불구속 기소됐다.

전경련 관계자는 “현재로서는 손 회장의 중도사퇴 가능성은 없고 정권과의 관계도 좋다”고 부인했지만 법정에서 손 회장의 유죄가 확정되거나 재계에 불명예가 될 만한 추가 혐의가 드러난다면 회장직 수행 여부가 불투명해진다.

이처럼 전경련과 정권과의 악연이 이어지고 있는 데 대해 재계는 전경련의 뿌리에서 원인을 찾는다. 4·19 혁명 이후 부정축재자로 지목돼 압박을 받던 재계 회장들은 61년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부회장의 요구로 가칭 ‘경제재건촉진회’를 결성했다. 이 촉진회가 바로 전경련의 전신이다. 전경련의 출발부터 뒷맛이 개운치 않았던 것.

전경련은 이후 경제개발 주역으로 부상, 80년대까지 군사정권과 호흡을 맞췄다. 전경련은 경제정책의 손발이 되어 정권의 안정성을 강화했고 정권은 각종 사업을 전경련 회원사에 분배, 한국 경제를 재벌 중심 경제구조로 정리했다.

전경련의 위상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90년대 들어서다.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재벌개혁에 대한 요구가 커졌고 여론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문민 정권과의 관계 정립이 어려워졌다. 또 김 전 회장이 고백했듯 전경련 회장이 과거를 잊지 못해 지나친 영향력을 행사하려다 권력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외환위기로 인한 ‘재벌신화 몰락’은 전경련의 위상을 급격히 허물어뜨렸다. 전경련은 이후 개혁 대상으로 전락했고 회장 자리가 빌 때마다 후임자 물색에 진통을 겪게 됐다. 정권과의 밀월관계가 끝난 이상 회장직이 더 이상 ‘좋기만 한 자리’가 아니게 된 것이다.

배극인기자 bae215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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