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CEO의 그룹스터디

  • 입력 2002년 12월 5일 16시 06분


서울고 출신 CEO들은 전여옥씨(왼쪽) 초청토론회에서 경영 현실과 책 속 이상의 괴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신석교기자
서울고 출신 CEO들은 전여옥씨(왼쪽) 초청토론회에서 경영 현실과 책 속 이상의 괴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신석교기자
《“왜 이제야 그렇게 열심히 읽냐. 꼭 시험볼 때 ‘벼락치기’하는 것 같네.”

“아냐 복습하는 거야.”

“야, 내 자리는 왜 여기야.”

“좋잖아, 저자하고 딱 맞은편이고….”

“안돼, 나 오늘 준비 제대로 안 해서 저자하고 눈 마주치면 곤란해.”

지난달 19일 저녁 서울 서초구 양재동 서울교육문화회관. 11층 뷔페의 방 한 곳이 시끌벅적했다. 대화 내용만 들으면 영락없는 시험 직전의 고등학교 교실이다. 그러나 대화의 주인공들은 환갑을 앞두고 있는 최고경영자(CEO)들이다.

이날은 서울고 16회 졸업생(1964년) 출신 CEO들이 한 달에 한 권씩 책을 읽고 모여 토론하는 ‘서울 16 CEO 독서포럼’의 16번째 모임.

토론회를 앞두고 저자를 기다리는 동안 한쪽에서는 코끝에 걸쳐진 돋보기 너머로 책에 밑줄을 그어 가며 막바지 ‘공부’에 한창이고 또 한쪽에서는 미처 마무리하지 못한 회사 서류를 정신 없이 읽고 있다.》

이날 포럼은 11월의 주제가 된 책 ‘대한민국은 있다’의 저자 전여옥씨를 초청했다. 경제 경영 관련 전문 서적이 아니어서 부인들도 토론회 멤버로 초청했다.

저자 전씨가 도착하기 직전 회장인 윤영달 사장(크라운제과)이 발제자인 김종성 사장(하나회계법인)에게 한마디를 던졌다.

“김 사장이 이 책에서 씹힌 대표적인 ‘사’자 가운데 한 명이니까 잘 하시겠지.”

이해익 리즈경영컨설팅사장이 토론회에서 오가는 얘기를 열심히 메모하고 있다./신석교기자

●위로받고 싶은 남자들과 전여옥

토론이 시작됐다. 전씨는 책에서 여성 인력을 활용하지 않는 기업인, 직분에 소홀한 전문가 집단, ‘떼거리즘’에 물든 오피니언 리더들을 특유의 독설로 강하게 비판했다. CEO들이 가장 예민하게 받아들인 부분은 여성 인력의 활용에 대한 부분.

윤영달 사장이 현실적인 고민을 털어놓았다.

“여자는 선이 가늘어 굵은 일을 못시킵니다. 그리고 여직원은 결혼과 동시에 회사를 그만 두는 경향이 여전합니다. 여직원을 중용하고 싶지만 현실적인 어려움이 많습니다. 오늘 명쾌한 해답을 얻었으면 하는 심정으로 나왔습니다.”

일부 CEO들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씨는 “직원을 대할 때 성별을 구분해서 보는 시각을 고치지 않으면 안 된다”면서 “남녀 구별을 하지 말고 능력에 따라 어떻게 부려먹을지만 생각하라”고 주문했다.

전씨는 이어 외국 사례를 예로 들었다.

“사회 생활을 하는 여자들에게 가장 큰 고민은 아이를 키우는 일입니다. 존슨앤드존슨은 숙련된 보모를 고용해 탁아소를 설치한 뒤 여성 인력을 십분 활용할 수 있었습니다.”

손을래 부사장(한성자동차)은 “탁아소를 설치한다고 해서 곧바로 생산성이 향상되느냐”고 반박하고 나섰다. 전씨는 “하루아침에 생산성이 높아지진 않겠지만 멀리 내다보고 사회적 시스템을 갖춰나가야할 때”라고 맞받았다.

현실에서의 고민이 비슷한 CEO들은 다른 사람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동감을 나타냈다. “생리휴가가 여성에게는 필요한 것이지만 사용자에겐 부담이 된다”는 지적이 나오자 한 참석자는 “생리휴가를 악용하는 사례도 있다”고 맞장구를 쳤다.

포럼 회원들은 저자와 시종 팽팽한 긴장을 유지했다. 여성의 수적 열세를 걱정한 듯 함께 참가한 부인 회원 중 곽명규 감사(한국 하니소)의 아내 김숙자씨가 강한 어조로 전씨를 지원하고 나섰다.

“생리휴가 걱정이 없는 50세 이상의 여자를 고용하면 되지 않느냐”고 포문을 연 김씨는 미국에서의 경험을 이야기했다.

“남편 따라 미국에 머무를 때 주변에 함께 놀 사람이 없었습니다. 모두들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도 일거리를 찾으려고 관련 기관을 찾아갔더니 이력서에 성별이나 나이를 적는 난이 없더군요. 직장을 구해 다시 일을 시작하니까 1분도 쉬기가 아까울 정도로 일이 재미있었습니다. 나이 든 여성의 에너지를 많이 이용해 주세요.”

토론이 끝나갈 즈음 한동혁 사장(대한제당)이 차분한 말투로 한마디를 뱉었다.

“책의 상당 부분이 한국 남자의 속을 헤집는 내용이어서 마음 편하게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비판을 받기 이전에 위로를 받고 싶은 게 한국의 남자들입니다.”

2시간여의 열띤 토론회가 끝났다. 전씨는 “오피니언 리더들이 이처럼 진지하게 책을 읽고 토론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고 촌평했다.

30년가량 기업 현장을 뛰어 실전에는 베테랑인 이들이 독서 토론회를 통해 추가로 얻는 게 과연 무얼까. 김수명 사장(대협철강)은 “읽은 내용을 당장 현장에 접목시키는 건 아니지만 앞으로 회사를 이끌어 갈 직원들에게 도움이 되는 책을 소개해줄 수 있게 된 것만 해도 큰 소득”이라고 말했다. 손을래 부사장은 “회사에 토론 문화를 정착시키려 노력 중”이라고 밝혔다.

발제를 위해 오후 3시반에 퇴근해서는 차를 어느 아파트 단지 주차장에 세워놓고 ‘벼락치기’로 책을 읽기도 했다는 한동혁 사장은 ‘CEO가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정의했다.

“독서모임을 시작한 후 ‘변화해야 한다’고 강박적으로 느끼게 됐습니다. 급변하는 세상에 회사와 사원, 그리고 사원 가족들의 운명을 책임지는 사람으로서 공부는 당연히 해야할 의무입니다.”

토론회가 끝나자 다시 ‘교실’이 시끌시끌해졌다.

“다음 발제는 한 사장이 하지.” “지난달에 했는데 뭘 또 하라고 그래.” “그러지 말고, 다음 책은 페이지 수도 많으니까 모두 한 챕터씩 나눠서 하자”

토론회 시간 동안 마음만은 고교 시절로 돌아가는 즐거움을 누린다. 그래도 나이는 속일 수 없는 듯 “몸이 따라 주지 않는다”는 탄식이 여기저기서 나온다.

“한 달 전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돌아서면 또 금세 잊어버려.”

“우리 나이는 뇌에 휘발성이 있어서 뭘 보고 읽어도 빨리 날아가. 문제는 이 휘발성이 책 내용만 앗아가는 게 아니라 그 전에 알고 있던 지식까지 함께 가져가 버린다는 거야. 허허….”

●57세 CEO들의 고민

전문 경영인으로선 은퇴 이후를 고민해야 할 나이인 57세.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한 달에 한 번씩 모여 책을 읽고 토론을 하도록 했을까.

이 모임을 구상한 사람은 이해익 사장(리즈경영컨설팅)과 윤영달 사장이었다. 99년 어느 날 식사 자리에서 두 사람은 밤낮으로 사람 만나고 업무 처리하고, 그나마 시간 여유가 생겨도 술 마시고 골프 하느라 책 한 권 제대로 읽지 않는 ‘CEO의 현실’에 대한 자탄을 주고받다가 독서모임을 만들자는 데 의견일치를 보았다. 고교 동창 중 고민을 공유할 수 있는 CEO급들로 대상을 좁혔다.

바쁜 CEO들을 모으는 것은 쉽지 않았다. 몇 달에 걸쳐 16명을 초기 멤버로 규합한 뒤에도 첫 토론 모임을 가질 때까지 책과 발제자 선정과 시간을 조율하느라 또 몇 달이 흘렀다. 1년에 가까운 준비 기간을 거쳐 첫 모임을 가진 게 2000년 5월.

현재 고재철 사장(대창석유), 곽명규 감사, 김광식 사장(삼아), 김수명 사장, 김종성 사장, 손을래 부사장, 신태용 사장(한신무역), 윤영달 사장, 윤윤수 사장(휠라코리아), 이대운 사장(델파이코리아), 이세일 회장(대한모방), 이해익 사장, 조재진 사장(영창), 한동혁 사장 등이 꾸준히 모임에 참가하고 있다. 부정기적으로 부인들도 모임에 참여시킨다.

이해익 사장은 “토론회가 거듭될수록 참석률이 높아졌다”고 밝혔다. 해외 출장에, 각종 모임에 바쁜 위치에 있다 보니 전원이 참석하는 경우는 드물다. 하지만 토론회를 매달 둘째주 화요일로 못박아 두고 각자 최대한 일정을 조정해 평균 10명 정도는 토론회에 참석한다.

주로 읽는 책은 경제 경영 관련 책들. ‘CEO 27인의 리더십을 배우자’ ‘잭 웰치 성공에 감춰진 10가지 비밀’ ‘마케팅 불변의 법칙’ ‘한국 경제 발전 전략’ 등의 책이 토론장에 올랐다. 사회, 문화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자는 취지에서 ‘현대 문명 진단’ ‘다데마에를 넘어 일본인 속으로’ 등의 책도 가끔씩 선택했다.

모임의 특징은 토론회 때마다 역자나 저자를 초청하는 것. 내년 1월 모임 때는 ‘미래의 경영’을 번역한 손병두 전경련 부회장이 참석할 예정이다.

포럼은 토론회에서 오간 얘기와 각자의 현장 경험을 접목해 함께 책을 낼 계획도 갖고 있다. 구상하고 있는 책의 제목은 ‘CEO도 공부해야 살아 남는다’.

금동근기자 go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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