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음하는 영남경제 현장취재

  • 입력 2000년 9월 8일 18시 25분


▶부산지역 - 실업율6.6%..."환란때보다 어렵다"

올해초 부산대 인문대를 졸업한 김모씨는 요즘 밤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다. 대학졸업후 대기업 세 곳에 원서를 냈지만 지방대 출신이라는 이유 등으로 한 곳은 아예 서류심사에서, 다른 두 곳은 면접에서 탈락했다.

눈을 낮춰 부산에 있는 ‘향토기업’에 들어갈까 생각도 했지만 그것도 쉽지 않았다. 과거 부산에서 꽤 알려진 기업이나 금융기관중 상당수가 이미 쓰러졌다. 회사수가 크게 줄어든데다 살아남은 회사들은 신입사원을 거의 채용하지 않았다. 뽑는다고 해도 생각보다 조건이 너무 낮은 기업이어서 ‘취업 재수’를 결심했다.

도서관으로 ‘출근’하는 그는 “군대까지 갔다왔는데 입사 연령제한에 걸려 인생을 망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올 상반기 부산의 실업률은 6.6%로 전국 6대 도시중 가장 높고 전국 평균보다는 2.1%포인트나 높았다. 작년에는 9.1%까지 치솟기도 했다. 고용불안이 경기침체에 따른 것이라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무너진 산업 및 금융기반〓부산 기업인 및 시민단체 관계자들은 한결같이 “요즘처럼 어려운 때는 없었다”고 우울한 표정을 짓는다. 부산경제가꾸기 시민연대 서세욱(徐世旭)사무처장은 “체감경기나 기업 등을 상대로 한 모니터링을 해보면 IMF사태때보다 안좋다”며 “삼성자동차 재가동에 희망을 걸고 있지만 1, 2년 사이에 호전될 것 같지 않다”고 말했다.

섬유업체인 ¤세정 박순호(朴舜浩)회장은 “엎친데 덮친 격으로 국제유가도 급등하고 정부의 국정운영능력도 믿을 수 없어 암담하다”고 한숨을 쉬었다.

지역 유통업계와 어업관련 업종, 건설업체가 특히 어렵다. 외환위기 이전까지 금융산업 육성방침에 힘입어 활기를 띠었던 부산의 금융산업도 최근 2년동안 점포수가 11.3%, 직원수가 25.4%나 격감했다.

부산경제가 국민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격감추세. 한국은행 이기형(李祁炯)부산지점장은 “지역내 총생산(GRDP) 기준으로 부산의 비중은 85년 전국의 8.1%에서 98년 6.4%로 낮아졌다”고 말한다. 1인당 GRDP도 전국 평균을 100으로 볼 때 98년 77.8에 불과하다. 그만큼 소득이 낮다는 의미다. 2·4분기 경기지표가 다소 나아졌지만 다른 지역보다 회복세는 훨씬 느리다. 부산의 인구비중(전국의 8.1%)과 생산 및 소득간 괴리는 부산경제의 현주소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지난해 부산으로 전근돼 일하고 있는 회사원 고모씨는 “부산의 모습은 80년대 후반에 왔을 때와 거의 달라지지 않은 채 정체돼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부산경제 왜 어려워졌나〓부산시 백운현(白雲鉉)경제진흥국장은 “부산은 80년대 중반까지 신발 섬유 합판 등 경공업 생산거점도시로 전국 수출비중의 20% 이상을 차지해 왔으나 정부의 대도시 성장억제 정책에 따른 중견제조업 이전과 신발 섬유산업 사양화, 대체산업 육성 실패로 산업공동화가 초래됐다”고 분석한다. 부산의 제조업 비중은 18.0%로 6대 도시중 가장 낮고 전국 평균(32.6%)보다도 낮다.

정보통신산업 등 미래형 산업이나 해운 항만 물류 등 산업도 취약하다. 제조업체중 50인 이하 소기업 비중이 6대 도시중 가장 높은 92.3%에 이르러 경영기반이 취약하다. 매출액 및 이익률은 전국 평균보다 훨씬 낮은 반면 부채비율과 차입금 의존도는 높다.

현정부 들어 취해진 일련의 정책이 부산경제를 더욱 어렵게 했다는 지적도 많다. 한 기업인은 “동남은행 퇴출과 부산지역 4개 종금사 폐쇄, 졸속 한일어업협정, 삼성자동차 빅딜과 가동중단 등이 겹치면서 부산경제가 회복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몰렸다”고 정부를 비판했다.

부산에 기업본사나 금융기관 본점 등이 부족한 상황에서 시민들이 기대를 걸었던 해양수산부 및 주가지수 선물업무의 부산이관이 계속 연기되는 것도 불만을 낳고 있다. 극심한 경제난은 인사정책에 대한 불만과 겹치면서 현정부에 대한 지역 민심을 갈수록 악화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

▽부산경제의 활로는 없나〓부산시와 기업인들을 중심으로 부산경제를 살리려는 몸부림은 있다. 부산시는 작년말 항만물류 관광 자동차부품 등 10대 전략사업을 선정, 산업별 육성계획을 마련했다. 프랑스 르노사에 인수돼 7일부터 본격적으로 재가동된 삼성자동차에 대한 기대도 크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지적이 많다. 부산기업인들은 “부산시민들이 그토록 삼성자동차에 매달렸던 것은 삼성차같은 대형 제조업체 하나가 지역경제에 초래하는 파급효과에 대한 기대때문이었다”며 “제조업의 공동화를 막을 수 있는 획기적 대책이 절실하다”고 입을 모았다. 또 해양수산부와 주가지수 선물업무 기능을 당초 약속대로 빨리 부산에 이전하는 등 행정서비스산업을 육성해줄 것도 건의했다.

▶대구지역 - 연쇄부도 공포..."추석쇠기 겁난다"

“더이상 의지할 곳이 없다. 추석이 지나 소규모 건설업체가 잇달아 쓰러지면 올 겨울은 너무나 추울 것 같다.”

대구지역 최대건설업체인 우방이 무너지자 대구시민들은 할말을 잃었다. 97년부터 문을 닫은 청구, 보성과 함께 대구건설업계 ‘빅3’였던 우방은 협력업체 1300여개, 관련종사자만 1만3000여명에 달할 정도로 이 지역경제 최후의 보루였다.

95년 이후 섬유산업 침체와 외환위기가 겹쳐 대규모 섬유업체가 대부분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이나 화의에 들어간데다 우방 부도로 건설 주택경기마저 최악의 수준으로 떨어져버렸다. 대구 경제를 지탱하는 두 개의 중심축이 무너진 것이다.

▽우방 협력업체, 연쇄부도 공포〓정부는 우방부도 이후 협력업체에 대해 업체당 특례보증 2억원, 진성어음 할인 유도 등의 지원책을 마련했지만 공염불에 그치고 있다.

건축설비업체인 보성설비 강길성 회장은 “신용보증기관에서 특례보증서 발급을 위한 신용도 조사에 2∼4주가 걸리고 그나마 신용도에 약간의 문제만 있어도 보증서가 발급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경북콘크리트 김상원 부장도 “신용보증서를 발급받을 정도의 기업이면 은행대출심사도 통과할 정도로 관문이 높다”며 “재하청업체의 공사대금도 10회, 20회 분할상환으로 연기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은행은 신용보증서를 갖고 오라고 다그치고 신용보증기관은 신용도가 낮다며 보증서를 발급해주지 않는다는 얘기다. 은행은 우방 진성어음조차 위험하다며 할인을 거절하고 있어 협력업체는 앞길이 막막하다.

강길용 회장은 “우방 진성어음 만기는 10월 이후부터 몰려있어 이대로 가다가는 추석 이후 연쇄부도사태가 현실화 될 것”이라며 “자금난으로 명절을 맞은 직원들에게 상여금을 한푼도 못준 것이 가슴아프다”고 전했다. 일부 기업은 7월분 월급마저 밀린 실정이다.

우방의 주거래은행이었던 서울은행이 우방 협력업체에 긴급히 자금을 지원하기로 했으나 큰 성과를 기대할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

▽섬유업체도 줄줄이 넘어간다〓이 지역 섬유업체들은 과거 저임금과 고환율을 이용한 소품종 다량생산에 주력해왔다. 그런데 사회 전반적으로 근로자 임금수준이 올라가면서 중국 인도네시아 등이 우리나라보다 훨씬 저렴한 노동력을 이용해 추격하자 당해낼 재간이 없었던 것.

미국과 유럽제품에 비해서는 품질경쟁에서, 아시아제품에는 가격경쟁에서 밀리면서 해외시장에서 설 곳을 잃어버린 것. 대구견직물조합 장혜준 상무는 “국제유가가 배럴당 35달러 이상으로 폭등하고 환율이 하락하면서 수출채산성은 더욱 악화돼 대형업체들이 배겨날 재간이 없었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갑을, 동국, 대하, 금강화섬 등 선두주자들이 잇따라 무너졌다.

대구시 조주현 섬유진흥과장은 “외환위기 이후 선진국처럼 다품종 소량생산 체제로 넘어가기 위한 구조조정 노력이 미흡했다”며 “반면 끊임없는 기술개발과 경쟁력강화 노력으로 당당히 세계시장에 진출한 중소기업도 있다”고 말했다.

▽탈출구는 없는가〓산업구조개편이 유일한 대안이지만 이마저 여의치 않다. 대구상공회의소 김규재 부회장은 “첨단산업을 유치하고 해양중심의 물류체계를 갖추는 것이 시급하다”고 진단했다.

그러나 공장 지을 땅이 없다. 현재 반도체장비 자동차부품업체 등 10여개 대형업체가 대구시에 약 10만평의 공장용지제공을 의뢰하고 있지만 마땅한 부지가 없어 입주신청을 포기하고 있는 실정이다.

또 정부는 대구지역 섬유산업 부활을 위해 6800억원 규모의 ‘밀라노프로젝트’를 시행하고 있으나 디자인 등 첨단기술을 단기간 내에 확보할 수 없다는 점에서 회의적으로 보는 시각도 많다.

<대구〓정용균·김두영기자>nirvana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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