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규사장이 본 김정일]능숙한 협상솜씨 발휘

  • 입력 2000년 6월 14일 18시 51분


98년10월 정주영(鄭周永)전 현대명예회장이 방북, 백화원영빈관에 묵고 있을 때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이 예고 없이 영빈관을 직접 방문, ‘왕회장’과 한시간 가량 면담했다. ‘정회장이 어른이시고 몸이 불편한 것 같아 직접 왔다’는 게 북한측 설명.

김위원장은 사진을 찍을 때도 “어른이 가운데 서라”고 양보했다. 북한체제에서 가운데 자리를 양보한다는 것은 대단한 의미.

김윤규(金潤圭)현대건설사장은 이를 계기로 “김위원장을 다시 평가하게 됐다”고 털어놓았다.

대북사업을 추진해온 현대 관계자들이 털어놓는 비화에는 김위원장의 성격이나 업무추진 스타일을 가늠해 볼 수 있는 대목이 많다. 흔히 그는 통이 크고 감동을 주기를 좋아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쉬운 협상 파트너로 여기면 큰 오산이다.

99년10월 왕회장과 정몽헌(鄭夢憲)현대아산이사가 흥남 서호 초대소에서 김위원장을 두 번째 만났을 때. 김위원장은 현대측이 애타게 추진하는 서해안 공단개발사업과 관련, “현대가 제출한 사업설명 비디오를 아직 못봤다”면서 “관계기관과 협의하라”고 말하는 등 구체적인 사업현안에 대해서는 확답을 피했다.

대신 “금강산 사업뿐만이 아니라 모든 대북사업을 현대가 독점하라” “북한에 석유가 나오면 남한에 먼저 주겠다”고 말하는 등 ‘립서비스’가 가능한 분야는 상대방을 띄워주는 발언을 계속했다.

김위원장은 이어 “물맑고 깨끗한 명예회장의 고향 통천에 투자하라”며 생각지도 않았던 통천공단 조성을 들고나와 현대측이 수락하도록 만들었다. 그는 또 “금강산 사업이 왜 빨리 안되느냐”며 배석한 김용순(金容淳)대남담당비서를 질책, 자신은 대북사업을 빨리 진척시키고 싶은데 부하들이 잘못하고 있는 것처럼 연출하기도 했다.

협상에 능숙한 그의 모습이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김위원장은 한국의 사정에도 대단히 밝다.

그는 정현대아산이사에게 “영화에서 서울을 봤는데 일본 도쿄보다 훌륭한 도시다. 단지 공해가 심하고 도시계획이 조금 잘못돼 복잡하다.” “남측은 크리스마스 때 노니까 남북농구를 그때하자.” “삼풍백화점이나 성수대교는 왜 무너졌느냐”고 말하는 등 한국의 영화와 뉴스를 꾸준히 접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김위원장의 고 박정희(朴正熙)대통령에 대한 평가에서는 그의 경제관도 엿볼 수 있다. 그는 “10월유신 때문에 비판은 많았지만 초기 새마을운동을 한 덕택에 경제발전의 기초가 된 것은 훌륭한 점”이라며 새마을운동과 올림픽 유치를 한국 경제개발의 성공요인으로 꼽았다.

“공산당 당수와 사진 찍으면 보안법에 안 걸리느냐.” “박정희 대통령이 막걸리를 잘 마셨다고 하는데 다음에 올 때 막걸리를 가져오라”고 말하는 등 유머감각도 여러 차례 과시했다.

<이병기기자>ey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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