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자구책 발표]"경제타격 무섭다" 채권단 한발후퇴

  • 입력 2000년 5월 29일 00시 28분


현대 사태 해결의 해법을 놓고 금융시장 안팎의 긴장감이 커지고 있다.

현대의 28일 자구 계획안에 대해 정부와 채권단이 당초에 강한 불만을 나타냈다가 뒤늦게 입장을 바꾸어 만족한다고 했지만 시장의 불신은 갈수록 증폭되고 있다.

정부와 현대가 접점을 찾는 데 사실상 실패함에 따라 극적인 반전이 없는 한 주식 채권 외환 등 자금 시장은 당분간 극심한 동요가 불가피하게 됐다. 현 정부가 재벌과의 대결 부담을 무릅쓰고 일관되게 추진해온 기업 지배구조 개선 등 기업 개혁 작업도 중대한 분수령을 맞았다.

▽현대 왜 버티나〓이번 사태를 보는 현대의 시각은 정부나 채권단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룹 전체의 자금 수급은 정상적으로 이뤄지고 있으며 다만 건설과 상선에서 일시적 미스매칭(만기불일치)이 발생했지만 그나마 상선은 별 무리없이 정상을 되찾았다는 것.

현대건설의 경우도 현재까지의 공사 수주 실적과 물량 확보 상황 등을 종합해볼 때 금융권이 일부 회사채와 기업어음(CP)의 만기 연장 등에 협조해 주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정부측이 주말인 27일 오후 긴급 대책회의를 갖고 자구 계획안 제출을 요구한 것도 상식과 순리에 어긋난다는 입장이다. 한 관계자는 “수조원에 달하는 자산 매각이나 자구안을 어떻게 24시간 만에 만들어낼 수 있느냐”면서 “일요일(28일)에 현대가 뭔가를 발표할 것처럼 알려진 것도 정부의 일방적인 요구일 뿐 현대의 뜻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채권단이 그룹의 ‘최고 어른’인 정주영명예회장의 완전 퇴진과 이익치현대증권회장 이창식현대투신사장 등 경영진의 경질을 요구한 것도 불만. 정명예회장은 건설과 중공업, 상선의 지분을 매각함으로써 경영권 이양을 통한 지배구조 개선을 일단락지었고 이회장과 이사장은 주총에서 신임을 받았기 때문에 ‘협상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논리다.

▽정부-채권단 왜 입장 바꿨나〓현대측의 완강한 버티기에 직면한 정부와 채권단은 처음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면서 현대측을 강하게 성토했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추가 협상이 필요하다는 쪽으로 방향을 수정했다.

재정경제부의 한 관계자는 “채권단과 현대 모두 이번 사태를 슬기롭게 해결하지 못하면 그 피해는 현대는 물론 우리 경제 전체로 돌아간다”면서 “정몽헌회장이 귀국하면 제대로 된 자구책을 내놓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현대그룹이 이날 내놓은 대책은 27일 긴급경제장관 회의의 요구 사항에 대한 중간 대응일 뿐 최종안은 아니라는 논리.

정부와 채권단의 전격적인 입장 변화는 현대그룹의 복잡한 내부 사정과 주초 자금 시장 동향 등을 두루 고려한 고육책으로 풀이된다. 6월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대북 사업의 전면에 서 있는 현대를 자극할 경우 남북 경협사업에 차질이 예상된다는 점도 감안됐을 것으로 보인다.

금융감독위원회 고위 관계자는 28일 밤 10시 주채권 은행인 외환은행과의 협의를 끝낸 뒤 “현대측 발표문 중 ‘향후 추진 상황을 채권은행과 협의해 확정하겠다’는 표현에 주목해달라”고 말했다. 어차피 협상이 계속될 것이고 주초 자금 시장의 동향에 따라 현대측의 후속조치가 나올 가능성이 큰 만큼 협상 조건과 한계를 미리 정해 놓지는 않겠다는 의미다.

정부가 현대에 대해 주문한 요구 사항의 골자는 △정명예회장의 확실한 경영 일선 퇴진 △가신그룹 등 주요 경영진의 대폭 물갈이 △주요 계열사 및 자산 매각 등 3가지. 앞의 두 항목이 인적 청산을 통한 기업 지배구조 개선을 염두에 둔 것이라면 세번째 요구는 당장 ‘발등의 불’이 된 유동성 문제 해결을 위해 반드시 관철돼야 한다는 게 정부와 채권단의 입장.

특히 인적 청산과 관련된 사항은 현대측이 결심하기에 따라 당장 발표할 수 있고 시장에 미칠 상징적 파급 효과도 크다는 점에서 정부측이 강하게 밀어붙였다.

현대측이 ‘그룹 인사의 핵심’인 이 문제에 대해 정부 요구를 거부함에 따라 ‘구세대 경영진의 퇴장’을 통해 시장 신뢰 회복을 유도하려던 채권단 계획은 차질을 빚게 됐다.

▽시장은 어떤 반응 보일까〓당장 관심은 29일 시장이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이냐는 점. 정부가 지난 주말 시중 자금 경색을 완화하기 위해 자금시장 안정 대책을 내놓았지만 현대측과의 원만한 합의에 실패함에 따라 대책의 약효가 떨어질 공산이 커졌다.

정부 대책의 취지는 투신권의 영업 기반을 강화해 은행권으로 몰린 자금중 일부를 투신으로 되돌린다는 것. 그러나 투신에 대한 시장 신뢰가 회복되지 않은데다 ‘현대 악재’까지 겹쳐 당분간 상황이 호전되기를 기대하기는 힘들게 됐다. 이제 관심은 금융시장 안정을 유지해야 할 책임이 있는 금융 당국이 현대에 대한 제재 효과를 거두면서 동시에 최악의 상황으로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어떤 방식으로 대응할지에 쏠리고 있다.정부가 일단 자구 노력 시한을 이달 말로 정하고 추가로 성의 있는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경우 금융 제재 등을 검토한다는 방침을 정한 것은 재협상에 필요한 시간을 벌면서 시장 여론을 동원해 현대측을 다시 한번 압박할 계기를 찾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시장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현대측 카드를 조건부로 받아들였지만 자금 시장 동향에 따라서는 좀더 강한 압박 수단을 동원할 여지도 남겨둔 것이라는 분석.현대건설의 유동성 부족에서 촉발된 현대 사태는 채권단과 현대측이 시장을 사실상의 볼모로 잡은 채 팽팽한 대결 구도를 펼침에 따라 금융 시장은 당분간 극도의 혼미 속에 출렁거리는 현상이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박원재·박래정·이병기기자>parkw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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