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출입 枯死위기 『무역금융 풀어라』

  • 입력 1997년 12월 13일 20시 42분


《은행들이 수출입신용장의 매입을 거의 10% 수준으로 줄이면서 무역업체 및 관련 하청업체들이 「공황」을 맞고 있다. 가뜩이나 국가신뢰도 하락으로 외국 거래선으로부터 가격인하 요구와 외상거래 축소 등 압박을 받던 처지에 국내은행들의 몸사리기까지 겹쳐 수출입 기반이 붕괴될 지경이다.》 ▼ 수출업체 애로 매월 평균 5억달러어치를 수출하는 LG전자. 지난 주부터 대금회수에 구멍이 생겼다. 일람불신용장(은행이 대금을 수출업체에 미리 지급한 뒤 10일내에 수입업체 거래은행으로부터 대금을 돌려받을 수 있는 기한부 수출환어음)을 제외한 유전스LC(대금회수기간이 수개월) DA(수출품이 해외에 도착한 뒤 거래은행에서 대금을 선지급받는 수출환어음) 등을 은행이 매입하지 않기 때문. 현재 거래은행이 사들이는 일람불 물량은 이 회사 전체 수출물량의 10% 내외. 환율이 천정부지로 치솟으면서 가격경쟁력은 회복됐지만 수출금융이 이뤄지지 않아 수출확대는 꿈도 꾸기 힘든 상황이다. 일람불 신용장 거래만 있다면 좋겠지만 그러다간 「10일내로 꼬박고박 대금을 입금하라」고 해외거래선에 요구하는 셈이니 지금 상황에선 안된다. 이 회사 강동우자금팀장은 『이번주에는 일람불도 제대로 될지 의문』이라고 비관적으로 말했다. 굴지의 수출업체인 이 회사가 이 정도면 신용이 떨어지는 중소업체는 말할 것도 없다. 물론 은행측도 할말이 많다. 연말까지 국제결제은행(BIS)자기자본비율을 지키는 문제를 제쳐놓더라도 달러 자체가 시장에서 자취를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은행 관계자는 『국내 수출기업에 미리 돈을 줬는데 수입업자로부터 대금을 받을 날이 되면 「신인도 하락」 「수출기업 파산가능성」을 거론하며 지급을 늦추는 사례가 늘어 은행측도 부담이 크다』고 말했다. S무역의 J차장은 최근의 사태를 『수출업무 10여년만에 처음보는 공황』으로 표현했다. 이 회사의 DA거래는 3주전에 끊겼다. 은행측이 일방적으로 끊은 것. 외상기일이 긴 유전스 거래는 생각할 수도 없다. 하청업체의 대금결제는 미룰 수밖에 없는 상황. J차장은 『조만간 주력시장인 동유럽과 중남미 시장의 거래업체들이 거래를 그만하자고 연락이 올텐데 상상만해도 끔찍하다』고 말했다. 김이나 1회용 기저귀 등을 수출하는 S사는 가격을 후려치는 외국 바이어들 때문에 골치다. 원화가치가 하루가 다르게 떨어지면서 생긴 현상이다. 최근엔 가격을 금융위기전 절반수준으로 낮추라는 협박을 일삼는 바이어도 나타났다. 하루 환율변동폭이 커 수출상담 자체가 이뤄지지 않는 날도 많다. 플랜트 수출업체인 D사의 S사장은 『우리나라의 대외신인도 추락으로 수출상담에 막대한 피해를 보고 있다』고 울분을 터뜨렸다. 수출하는 기계류에 대한 신뢰도가 국가신뢰도와 함께 땅에 떨어져 가격인하 압력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박래정기자〉 ▼ 원자재 수입마비 은행들이 수입신용장 개설을 거부, 원자재 수입이 전면 중단될 위기에 빠져 원자재값이 폭등하고 생산에 차질을 빚는 등 실물경제가 마비상태에 이르고 있다. 일부 원자재 수입상은 상당기간 수입이 힘들다고 보고 확보된 물량을 쌓아두고 가격이 더 오를 때까지 원자재를 공급하지 않는 매점매석의 작태까지 보이고 있다. LG전자 삼성전자 등 전자업체들은 평균 월 1억달러어치의 원자재를 수입해 왔으나 지난주부터 수입신용장 개설이 중단되면서 당장 가전제품 생산에 차질을 빚고 있다. 업체 관계자는 『당장 공장에서 원자재 공급을 해달라고 난리인데 현재로서는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대우자동차 등 자동차업계도 원자재 수입을 당분간 중단하고 있다. 이 회사 자금팀 관계자는 『은행이 수입신용장 개설을 거부하고 자체 달러 확보도 어려워 이달초부터 원자재수입을 중단하라고 해당부서에 통보했다』며 『다른 자동차업체도 비슷한 상황』이라고 밝혔다. 상사를 통하지 않고 팜유 등 유지(油脂)를 직접 수입하는 식품업체들도 최근 일람불조건의 수입신용장만 허용돼 골치를 썩이고 있다. 이같은 원자재수입 파동은 대기업도 휘청거리게 하지만 중소기업 벤처기업 등에는 당장 공장문을 닫아야 할 정도의 직격타로 작용하고 있다. 섬유날염과 프린팅 원단을 의류업체에 공급하고 있는 중소기업체 고재사(대구)는 원자재를 구하지 못해 납품하지 못하고 있다. 원자재업체들이 중국에서 날염의 원료를 수입하고 있는데 수입신용장 개설이 안된다는 이유로 확보한 물량도 내놓지 않아 거래가 없는 상태에서 가격이 ㎏당 5천원에서 1만2천원으로 폭등했다. 이 업체의 한 관계자는 『올해 안에 수입신용장을 열어주지 않으면 공급중단 사태가 일어나고 이 상태가 한달만 이어지면 대구 섬유공장 70∼80%가 문을 닫아야 할 형편』이라고 말했다. 네트워크장비를 자체 개발해 내수시장 및 수출시장에 내놓고 있는 한아시스템도 유일한 수입 원자재인 모뎀을 들여와야 하지만 신용장개설이 되지 않아 수입을 못했다. 결국 최근까지 제품생산을 하지 못했던 이 회사 사장은 할 수 없이 직접 미국으로 가 일단 제품을 외상으로 들여왔지만 그 사이 환율이 5백원 가까이 뛰는 바람에 엄청난 적자를 봐야할 형편. LG경제연구원의 이윤호(李允鎬)원장은 『우리나라는 원자재를 수입, 제품을 만들어 수출하는 경제구조인데 무역금융이 이렇게 마비되면 사실상 파멸의 길로 가는 것』이라며 『근본원인은 은행이 자기자본비율을 맞추는데 있는만큼 정부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현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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