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도회오리 어디서?]고장난 금융시스템이 기업 잡는다

  • 입력 1997년 12월 6일 20시 48분


금융권과 기업이 함께 무너지는 초유의 금융대란이 올 수 있다는 우려가 점차 증폭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거래기업이 일시적인 자금난으로 쓰러지더라도 아무도 도와줄 수 없다. 대규모 부실채권으로 은행이 무너질 판인데 은행이 기업을 위해 피같은 자금을 내줄 리가 없다. 정부도 그동안 기업부도 처리과정에서 잦은 말바꾸기와 정책 실기(失機)를 남발, 도무지 말에 씨가 먹혀들지 않는다. 게다가 국제통화기금(IMF)에 경제분야의 지휘봉을 넘긴 정부가 개별 기업과 금융기관에 이래라 저래라 참견할 수도 없게 됐다. ▼금융시스템, 무엇이 잘못됐나〓도대체 금융시스템의 어떤 부문이 잘못됐기에 금융과 기업이 동시에 부도회오리에 휩싸이게 됐을까. 직접적인 계기는 지난 2일 9개 부실종금사에 대한 업무정지 조치가 화근이 됐다. 금융기관도 일반인들처럼 자금을 운용하다보면 돈이 부족할 수도 있고 남을 수도 있다. 부족하면 어딘가에서 꿔야 한다. 시중은행의 경우 한국은행에서 직접 빌리고 종금사는 은행에서 부족한 자금을 빌려 메운다. 증권사도 은행 콜자금의 주요 고객. 문제는 자금순환 구조상 한가운데에 있는 종금사와 증권사가 한꺼번에 부실해지면서 원활한 자금흐름이 일거에 붕괴된 것. 즉 자금난에 빠진 종금사와 증권사가 부족자금을 은행에서 빌려 메워야 하는데 시중은행이 「뭘 믿고 돈을 빌려 주느냐」며 대출을 거부한 것이다. 급기야 5일에는 고려증권이 시중은행의 대출거부로 부도가 났다. 다급해진 종금사가 대출금을 한꺼번에 회수하는 바람에 한라그룹도 최종부도를 내고 말았다. ▼아무도 믿지 못한다〓금융기관의 신용도를 믿지못하는 것은 일반인뿐만이 아니다. 금융기관이 기업을 불신하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뿌리깊게 자리잡은 관행. 문제는 은행 종금사 증권사 등 금융기관간 불신의 골이 너무 깊어 이들 사이의 자금이동이 완전히 차단된 것이다. 어디서부터 막힌 물꼬를 터야 할지 난감하기만 하다. 한은이 종금사의 자금지원을 위해 시중은행에 자금을 공급해도 은행이 종금사 대출을 거절하고 있다. 정부도 불신의 대상. 시중은행들은 정부가 보증을 서줄테니 종금사에 콜자금을 주라고 해 빌려줬더니 정작 종금사 업무정지로 콜자금을 떼이게 될 판이라고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대마(大馬)가 더 위험하다〓이런 금융시스템에서는 오히려 규모가 큰 그룹이 부도가 날 가능성이 높다는 게 금융계의 지적이다. 종금사가 자구책으로 기존 여신을 무차별적으로 회수할 게 뻔하고 그 타깃은 수천억원씩 빌려간 대그룹이 될 수밖에 없다. 한라그룹도 최근 열흘사이 종금사에 1천1백억원의 빚을 갚느라고 진이 다 빠졌다. 대기업은 「이제 누구도 기업을 보호해주지 못한다」는 사실에 바짝 긴장하고 있다. 시중은행의 한 고위임원은 『기업 연쇄부도는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경고했다. 〈이강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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