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품의 원본은 결과물이 아니라, 창작하는 과정이 아닐까”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10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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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고은 장편소설 ‘불타는 작품’
백만장자인 개가 인간 화가 후원
“작품중 하나 소각하라” 조건 내걸어
‘웃픈’이야기속 예술의 의미 고민

윤고은 작가는 “‘불타는 작품’을 노트북으로 쓰는 동안 자주 예술작품 원본의 의미에 대해 생각했다. 컴퓨터 파일, 인쇄본, 교정지 중 어떤 것을 원본으로 불러야 될지 모르겠다”고 했다. ⓒ백다흠
윤고은 작가는 “‘불타는 작품’을 노트북으로 쓰는 동안 자주 예술작품 원본의 의미에 대해 생각했다. 컴퓨터 파일, 인쇄본, 교정지 중 어떤 것을 원본으로 불러야 될지 모르겠다”고 했다. ⓒ백다흠
“작가님이십니까?”

어느 날, 배달 라이더 안이지는 로버트 재단의 최 부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안이지는 화가를 꿈꿨으나 연이은 실패로 생계 유지를 위해 라이더로 일하고 있었다. 로버트 재단은 전시회에 참여하면 안이지를 후원하겠다고 했다. 예상치 못한 제안에 안이지는 배달하던 햄버거가 식고 셰이크가 녹았는지도 몰랐다.

로버트 재단은 안이지에게 4개월 동안 작품 1개 이상만 완성하라고 했다. 쾌적한 숙소, 무제한 식사도 제공하겠다고 했다. 활동비, 재료비는 물론이고 전시를 원하면 전문 인력도 지원한다고 했다. 그런데 로버트 재단엔 이상한 점이 있었다. 재단 이사장인 로버트가 사람이 아니라 ‘개’라는 것이다. 대체 이 재단의 정체와 꿍꿍이는 뭘까.

12일 출간된 윤고은 작가(43)의 장편소설 ‘불타는 작품’(은행나무·사진)은 저택에 사는 백만장자인 개가 인간 예술가를 좌지우지하는 ‘웃픈’(웃기면서도 슬픈) 이야기다.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17일 만난 윤 작가는 “언젠가 ‘동물 중에 개가 가장 친근하다. 이왕이면 개가 집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농담을 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이 농담이 시간이 지나 소설이 됐다”고 했다.

“마당 딸린 집에 사람과 개가 있으면 보통 사람이 주인이라고 생각하죠. 하지만 개가 주인이라는 설정으로 통념을 뒤집고 싶었어요. 하하.”

로버트 재단은 전시회 마지막 날에 작품 중 하나를 소각해야 한다는 조건도 내걸었다. 작품을 불태워 사람들의 관심을 끌겠다는 것이다. 이런 설정은 바나나를 테이프로 벽에 붙인 이탈리아 작가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작품 ‘코미디언’을 떼어내 먹는 행위가 화제가 되는 현대 예술에 대한 풍자처럼 느껴진다. 윤 작가는 “예술작품이 다른 예술작품보다 더 주목받아야 살아남는 게 현실”이라며 “일단 주목받아야 이후에 가치가 부여되는 구조를 그리고 싶었다”고 했다.

“작품을 불태우면 사진이 남더라도 원본은 사라지는 거잖아요. 예술가가 스스로 작품을 불태울 수 있을까 하는 딜레마, 또 예술품의 원본은 결과물이 아니라 예술가가 고통스럽게 창작하는 과정이 아닐까 하는 고민을 담았습니다.”

그는 2021년 장편소설 ‘밤의 여행자들’(2013년·민음사)로 영국 추리작가협회가 주관하는 대거상 번역추리소설상을 수상했다. 그는 ‘밤의 여행자들’의 후속작을 준비하고 있다. “재난 여행이라는 소재는 유지하되 주인공은 바뀔 것”이라고 했다.

지난해엔 편혜영, 이홍 작가와 문학 에이전시 ‘에이전시 소설’을 세웠다. 이 회사는 ‘불타는 작품’이 국내에 출간되기 전 영미권 출판사에 판권을 수출하기도 했다.

“최근 한국문학이 해외에서 관심을 모으고 있잖아요. 한국 작가들의 문학성이 손상되지 않게 해외에 배달하는 라이더가 되고 싶습니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윤고은#불타는 작품#예술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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