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에 맞는 건 ‘리어왕’ 뿐”… 마지막 ‘리어왕’으로 돌아온 이순재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5월 2일 11시 3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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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리어왕’에서 주역을 맡은 배우 이순재(사진)는 “무대 위에서 만나는 관객 한 명 한 명에게 소중함과 감사함을 느낀다”고 했다. 양해성 촬영, 더웨이브 제공


“고전은 대사 한마디 한마디에 명장면이 담겼어요. 그 장면을 제대로 찾아 무대 위에서 진솔하게 전달하고, 관객이 감동을 받으면 그게 배우로서의 기쁨 아니겠습니까.”

배우 이순재 씨(88)를 만나 연극 ‘리어왕’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다음달 1일 서울 강서구 LG아트센터 서울에서 개막하는 연극 ‘리어왕’에서 주인공으로 무대에 오른다.

이순재에게 ‘리어왕’은 특별한 작품이다. 2021년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에서 공연된 ‘리어왕’에서도 그는 주역을 맡아 모든 회차 공연 티켓을 매진 시키며 노배우의 위력을 보여줬다. 하지만 이번 공연을 끝으로 그는 더이상 ‘리어왕’ 무대에 오르지 않겠다고 밝혔다. 지난달 28일 서대문구의 연습실에서 만난 그는 “다른 배우들도 해야지, 2번이나 했으면 충분하지 않겠냐”며 “80대에 이 역할을 할 수 있는 건 내게 큰 행운이자 만용이었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배우 이순재 씨는 “(연극 ‘리어왕’을 준비하며) 셰익스피어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연출로 재주 피우지 말고 원전을 그대로 살려보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양해성 촬영, 더웨이브 제공


이 씨의 ‘리어왕’은 국내에선 드물게 원전을 거의 빠짐없이 살려 공연된다. 총 16회 열리는 공연은 회차당 러닝타임이 3시간20분에 달한다. 2021년 초연 당시 절대 권력을 가진 왕이 간교한 아첨에 넘어가 미치광이 노인으로 전락하는 과정을 깊이 있게 표현해내 극을 이끄는 카리스마를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통치자로서 여민동락(與民同樂·백성과 즐거움을 함께하다)을 강조한 3막4장의 독백은 오늘날에도 갖는 의미가 크다”며 “한평생 배우로 살아보니 연극에는 우리 사회를 바꿀 힘이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번 공연에서 리어왕의 세 딸은 배우 권민중과 서송희, 지주연이 맡는다.

연극과 영화, 드라마 등 총 244편에 출연했지만 셰익스피어 ‘4대 비극’과 그의 연은 손에 꼽을 정도다. 1956년 연극 ‘지평선 너머’로 데뷔한 이후 그가 4대 비극(햄릿·오셀로·맥베스·리어왕)을 연기하는 건 지난 초연을 포함해 이번이 세 번째다. 1969년 출연한 극단 실험극장의 ‘맥베스’에선 던컨의 아들인 맬컴 역을 배우 이정길과 번갈아 맡았다.

“4대 비극은 어려서부터 좋아했지만 기회가 없었어요. 영화 보는 게 유일한 낙이던 대학교 2학년 때 영화 ‘햄릿’(1954)을 보러갔습니다. 로렌스 올리비에 경(1907~1989)이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를 읊는데 평생 못 잊을 전율을 느꼈죠. 이후로 햄릿 역에 탐은 났지만 키가 작아서인지 제안이 없었고, 이제 내 나이에 맞는 건 리어왕뿐이에요. (웃음)”

변함없이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적확한 단어로 말하는 배우 이순재 씨는 요즘도 한국어발음소사전을 들춰본다며 “연기에는 끝이 없다”고 말했다. 더웨이브 제공


아흔을 내다보는 고령의 배우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후 2시부터 오후 9시30분까지 7시간 넘게 이어지는 연습에 빠짐없이 참석 중이다. 대본은 3월 초부터 외우기 시작해 이미 암기를 거의 끝낸 상태다. 그는 “나이가 드니 별 수 없이 대사를 깜박깜박해 자다가 일어나도 대사를 연습할 만큼 최선을 다한다”며 “대사는 한 달간 숙성을 거쳐 단어마다 깊이를 더할 것”이라고 했다. 주역과 함께 맡은 예술감독 역할에 대해선 “최근 연극이 외형적으로는 다채로워졌지만 대사라는 본질이 무너진 경우가 많아 구사력에 관한 조언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연극 ‘장수상회’ 공연도 병행 중인 그는 ‘쓰러지기 직전까지’ 연기를 놓지 않겠다고 했다.
“이번 공연이 끝나면 노년층의 이야기를 다룬 코믹한 드라마를 찍을 예정이에요. 여러 작품을 하는 게 이젠 힘에 부치기도 하지만 내년에도 조건이 허락한다면 연극 ‘시련’을 다시 무대에 올려보고 싶어요. 과거 알파치노가 울분을 토하며 열연했던 ‘베니스의 상인’ 샤일록 역도 재밌어 보입니다. 하하” 공연은 다음달 1일부터 18일까지. 4만4000~9만9000원.

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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