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1차 세계대전이 현대예술에 새긴 흔적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3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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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제전/모드리스 엑스타인스 지음·최파일 옮김/592쪽·2만9000원/글항아리

“아내는 ‘볼리 부인의 고양이가 새를 잡아먹었네’, ‘크램프 부인 여동생의 새 드레스가 어떻네’ 하는 시시콜콜한 소식을 들려주느라 바빴어.”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휴가차 잠시 고향을 찾은 영국인 병사는 “전장에서 내가 겪은 얘기를 아내에게 꺼낼 기회조차 없었다”고 친구에게 말했다. 거대한 참호 사이에서 포탄이 작렬하고 살인가스가 퍼지는 전장의 비극은 이해의 범위를 한참 넘어섰다. 1916년 3월 휴가를 나온 프랑스 병사 루이 메레가 평소와 같은 일상을 보내는 동네 이웃들의 모습에 큰 충격을 받은 것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대량 살육전의 효시였던 제1차 세계대전은 가족은 물론이고 사회와 세계로부터 참전용사들을 철저히 소외시켰다. 당시를 겪은 예술인들이 과거의 전통과 권위를 철저히 배격하고 자아에 침잠한 아방가르드 사조에 빠져든 배경이다.

독일 현대사를 연구한 캐나다 역사학자인 저자는 이 책에서 1차대전이 현대인의 의식과 예술에 끼친 영향을 면밀히 추적하고 있다. 거대 담론을 늘어놓는 데 그치지 않고, 병사들의 실질적 체험을 살펴봄으로써 전쟁이 개인에게 남긴 궤적을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저자가 머리말에 “아방가르드와 나치돌격대(SA) 사이에 친연성이 있을 수 있다”고 쓴 대로 얼핏 전혀 상관없을 것처럼 보이는 두 개념이 깊숙이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묘파한 후반부가 특히 인상적이다.

젊은 시절 화가를 지망한 히틀러가 1차대전으로 깊은 상처를 입은 독일인들을 동원할 수 있었던 건 이성과 철학이 아닌 감성과 예술이었다. 게르만족을 위한 레벤스라움(생존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죽음의 제전인 전쟁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했다. 처녀를 제물로 바치는 내용의 파격적인 발레 작품 ‘봄의 제전’을 책 제목으로 붙인 이유다. 이 작품을 통해 선율에서 리듬으로 음악의 중심축을 뒤흔든 스트라빈스키의 도발은 어떤 면에서는 과거와의 단절을 의미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1차 세계대전#현대예술#봄의 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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