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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문화

5000년 전 점토판에 잠든 최초의 문명을 깨우다[책의 향기]

입력 2021-12-25 03:00업데이트 2021-12-25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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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역사 수메르/김산해 지음/544쪽·3만3000원·휴머니스트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박물관에 보관돼 있는 수메르 점토판. 수메르 문명의 21번째 왕조인 아카드 왕국이 건설된 과정이 적혀 있다. 휴머니스트 제공

지난달 개봉한 마블 스튜디오의 신작 영화 ‘이터널스’에서 히어로로 등장한 마동석의 역할은 ‘길가메시’였다. 이터널스 멤버들 중 물리적 힘이 가장 강한 전사로 묘사되는 길가메시는 다른 히어로들이 창과 방패, 초능력을 쓸 때 강력한 주먹으로 적들을 쓰러뜨린다. 과연 마동석에게 딱 어울리는 역할이다. 그런데 궁금증이 생긴다. 우리의 ‘아트박스 사장님’(영화 ‘베테랑’에 카메오로 출연한 마동석의 역할)이 할리우드에서 화려하게 데뷔해 반갑기는 한데 도대체 길가메시는 어디에서 튀어나온 캐릭터일까.

길가메시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있던 수메르의 도시 ‘우루크’를 다스린 전설의 왕이다. 그의 존재를 모티브로 한 신화들을 엮은 ‘길가메시 서사시’가 유명하다. 기록으로 남아있는 현존 서사시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원전 6500년∼기원전 2004년에 존재한 수메르 문명은 인류 최초의 문명으로 꼽히지만 국내에는 관련 연구자가 별로 없다.

이 책은 영어 등으로 쓰인 해외 연구서를 번역한 게 아니라 수메르어를 한글로 직역한 연구서라는 점에서 이례적이다. 저자는 신화와 인류학을 전공하고 30년 넘게 수메르 역사 연구에 매달렸다. 13년간 세계 18개 박물관에 보관된 수백 장의 수메르어 점토판에서 설형문자 기록을 일일이 발췌해 수메르 역사를 짜임새 있게 복원해냈다. 오류를 최소화하기 위해 5000여 년 전 작성된 1차 사료에 철저히 근거했다. 저자는 ‘길가메시 서사시’의 점토판 원전을 국내에서 처음 한글로 번역했다.

‘수메르’라고 적힌 설형문자.
그가 건져 올린 역사적 진실은 놀랍다. 수메르 연구자들 사이에서 교과서처럼 쓰이는 사료인 ‘수메르 왕명록’에서 중대한 역사 왜곡이 이뤄진 사실을 발견한 것. 저자가 해독한 점토판에서 왕명록에 없는 에덴전쟁과 여기 참가한 수메르 최대 도시 ‘라가쉬’에 대한 기록들이 확인됐다. 기록으로 남겨진 인류 최초의 전쟁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수메르 왕명록을 쓴 이가 정당성 없는 왕조인 ‘이씬’의 사람이었으며 그가 라가쉬 관련 기록을 의도적으로 삭제했다고 주장한다. 왕명록이 기록될 당시는 이씬이 라가쉬로 인해 위기에 빠진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라가쉬가 일군 통일국가와 태평성대, 노예해방, 사회개혁 등 중요한 역사적 성과들이 모두 지워졌다. 저자는 “최초의 역사 왜곡으로 상실된 모든 ‘최초’는 총 57가지에 이른다”고 지적한다.

수메르인의 경제-생활-문화로 나뉘어 이야기 흐름이 툭툭 끊기던 기존의 주제별 서술 방식에서 벗어나 역사 맥락을 반영한 전개 방식을 택한 것도 이 책의 미덕이다. 8500년 전에도 인류는 도시를 세우고 문명을 발달시켰으며 자연재해를 입고 쓰러진 도시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때로 전쟁을 벌였고 권력 다툼과 부정부패가 이어졌으며 왕조는 계속 바뀌었다. 역사는 도대체 얼마나 반복되는 걸까. 세상 모든 역사의 ‘최초’가 궁금한 독자라면 한번쯤 읽어볼 만한 책이다.

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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