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터리 과학자는 어떻게 스탈린의 총애를 얻었나[책의 향기]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10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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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센코의 망령/로렌 그레이엄 지음·이종식 옮김/268쪽·1만6000원·동아시아

유전학자 트로핌 리센코(오른쪽)와 니키타 흐루쇼프 전 소련 공산당 서기장. 리센코는 주류 유전학계에서 용도 폐기된 ‘획득 형질의 유전’을 주장하며 권력자들과 밀착했고 소련 과학계를 파탄으로 몰아넣었다. 동아일보DB
유전학자 트로핌 리센코(오른쪽)와 니키타 흐루쇼프 전 소련 공산당 서기장. 리센코는 주류 유전학계에서 용도 폐기된 ‘획득 형질의 유전’을 주장하며 권력자들과 밀착했고 소련 과학계를 파탄으로 몰아넣었다. 동아일보DB
“기린들은 높은 나무의 잎을 뜯어먹으며 목이 길어졌고, 대대로 그렇게 길어진 목을 물려주어 지금의 기린이 되었다.”

오래전 용도 폐기된 라마르크의 용불용설(用不用說)이다. 그 자리는 ‘목이 긴 기린만이 생존에 적합해 후손에게 유전자를 물려주게 되었다’는 적자생존설이 대체했다.

그러나 1965년까지 소련을 비롯한 공산세계에서는 ‘생물이 자기 대에 획득한 형질을 후손에게 물려줄 수 있다’는 이론이 통용됐다. 젖소를 잘 돌보아 우유가 많이 나오면 그 후손들도 젖이 많아진다는 식의 생각을 한 것이다. 저자는 그 중심에 선 소련 농학자 트로핌 리센코(1898∼1976)와 그에게 유리한 토양을 마련한 소련 체제에 돋보기를 들이댄다.

겨울 밀 품종을 봄 밀로 바꿀 수 있다는 리센코 이론은 농업혁명을 이루려는 소련 정권의 구미에 맞았다. 스탈린과 그의 뒤를 이은 흐루쇼프는 그의 연구를 대대적으로 장려하고 선전했지만 흐루쇼프 실각 후 러시아 유전학자들은 그가 소련 농업에 지대한 피해를 초래한 사기꾼이라고 비난했고 리센코는 권위를 상실했다.

저자가 긴 추적 끝에 1971년 만난 리센코는 ‘소박한 농민으로 시작해 논밭에서 지식을 얻으며 평생 투쟁해 왔는데 이제 세상이 외면한다’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리센코는 자기의 세계에 빠진 순수한 연구자가 아니었다. 그는 DNA의 역할과 적자생존을 믿는 정통 유전학자들을 “서방의 간첩”이라며 당국에 고발했다. 경쟁자였던 바빌로프는 구금되어 옥중에서 굶어 죽었고 그 밖에도 학자 수백 명이 시련을 겪었다.

1990년대와 2000년대를 거치며 유전학계에는 반전이 일어났다. DNA가 ‘유전의 지휘자’라기보다는 도서관과 같은 ‘정보 보관소’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환경이 유전자에 담긴 스위치를 켜거나 끔으로써 유전 형질의 발현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고, 이렇게 환경에 의해 발현된 형질은 심지어 몇 세대 동안 후대에 전해질 수도 있었다. 리센코는 옳았을까.

저자의 결론은 단호하다. 새로 발전한 21세기의 ‘후성 유전학’과 리센코주의에 유사성이 있다면 우연일 뿐이었다. 리센코는 DNA를 무시하고 멘델의 법칙을 부인했으며 유전자형과 표현형을 구별하지 않는 등 명백한 오류들을 외면했다.

더 위험한 것은 소련과 스탈린 통치에 향수를 느끼는 사람들일수록 ‘리센코는 옳았다’는 선동에 열광한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심지어 ‘리센코주의가 방해받지 않고 지속됐으면 암, 에이즈, 당뇨 등의 치료법을 진작 발견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책은 유전학에 관한 책인가, 공산주의에 관한 책인가. 저자는 ‘과학사학자의 역할은 과학자들의 견해가 어떻게 시대의 이데올로기와 연결되는지 조명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한 시대와 체제를 풍미한 리센코주의나 오늘날의 후성 유전학을 소개하는 것만이 목적은 아니다. 과학이 어떻게 권력에 따라 왜곡되고 변질될 수 있는지, 그 위험을 깨기 위한 지식인의 역할은 무엇인지 이 책은 돌아보도록 한다.



유윤종 문화전문기자 gustav@donga.com
#스탈린#총애#리센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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