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영수 대신 춤과 노래…‘아이돌 선행학습’ 나선 초등생들

히어로콘텐츠팀 입력 2021-07-20 03:00수정 2021-07-20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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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한국산 아이돌] 〈1〉‘방탄보유국’ 아이들이 사는 법
기본기에 충실하는 수업인 만큼 매 수업 이전에 배웠던 손발뻗기, 웨이브 동작을 함께 점검한다.


토요일인 17일 오후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있는 K팝 아카데미인 SL스튜디오 앞 골목에 승용차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혼자서는 버스와 지하철을 타지 못하는 초등학생 자녀를 위해 ‘아카데미 셔틀’에 나선 부모들의 차량이었다. 이곳과 몇 블록 떨어진 대치동 학원가와 다르지 않은 풍경이었다.

어린 학생들이 연습실 뒤 의자에 앉으면 아직 바닥에 발이 닿지 않는다.


다른 게 있다면 K팝 아카데미에 다니는 아이들은 국·영·수 대신 춤과 노래를 배운다. 또 ‘SKY(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등 명문대 신입생이 아닌 ‘SHJY(SM HYBE JYP YG)’ 같은 유명 엔터테인먼트 회사 연습생을 꿈꾼다.

주요기사
연습생 입성 위한 치열한 선행학습


“파이브, 식스, 세븐, 에잇.”

‘기본 루틴’ 수업이 진행되는 연습실에 들어서자 네 번의 박수 소리와 함께 걸그룹 노래가 울려 퍼졌다. 10여 명의 아카데미 원생들은 거울을 노려보며 박자에 맞춰 절도 있게 손발을 뻗었다. 연습으로 다져진 몸짓은 일사분란 했지만 양 갈래로 머리를 묶은 뒷모습과 고사리 손이 영락없는 어린아이였다. 가장 작은 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 가장 큰 아이는 6학년이었다.

K팝 아카데미인 SL 스튜디오의 기본 루틴 수업에서 턴 동작을 배우고 있는 초등학생들.


아이들은 스피커에서 나오는 최신곡의 안무를 소화할 수 있을 만큼 연습을 한 상태였다. 하지만 춤의 기본인 손발 뻗기, 웨이브, 회전 동작을 배우는 이 수업에서는 단순 동작을 쉼없이 반복했다.

기본 루틴 수업에서 턴 동작을 배우고 있는 아이들.


김용재 댄스 트레이너는 “한창 멋진 아이돌 댄스를 선보이고 싶을 나이지만 아이들은 왜 기본 동작을 연마해야 하는지 이해한 상태에서 온다”고 했다. 연예기획사 연습생이 되더라도 손끝, 발끝까지 정교하게 표현해야 하는 ‘칼군무’를 해내지 못하면 언제든 방출될 수 있다. 춤을 잘 추더라도 상대평가에서 다른 연습생에게 밀리면 데뷔조에 들지 못한다. 한살이라도 어릴 때 기본 동작들이 제대로 몸에 베어있도록 훈련을 시작하는 이유다.

수업의 마무리는 근력운동과 스트레칭. 아직 너무 어린 저학년(2~4학년)은 잠시 열외다.


기본 동작 연습 후에는 플랭크(40초씩 3회), 버피(15회) 같은 전신 근력 운동이 이어진다. 초등학교 2~4년 원생들은 이 운동을 하기엔 너무 어려 잠시 뒤로 빠져야 하는 시간이다. 연습실 뒤편 계단식 의자 첫 칸에 나란히 앉은 아이들은 바닥에 닿지 않는 다리를 이리저리 움직여가며 언니, 오빠들을 지켜봤다.

“다음 주에 평가 보겠습니다.”

김 트레이너가 이날 연습을 마치며 말했다. 아이들은 아카데미 때부터 연예기획사 연습생들처럼 매달 마지막 주에 실력을 평가받는다. 월말평가 날에는 학부모들이 모두 초대된 단체 카톡방에 학생들의 영상과 함께 학생별 평가가 올라온다.

지민이의 보컬 노트 필기장. 기본 발성부터 끝음 처리, 퍼포먼스 같은 기교에 대한 내용까지 수업 때 배운 내용을 빼곡히 적어뒀다.


“안 쓰는 손 정리” “손에 힘은 좋아졌으나 느리며 더 뒤로 뻗어야함” “올라올 때 몸이 앞으로 기울여지지 않아야” “손을 너무 몸에 붙이고 있음”….

학부모로선 유명 기획사에서 댄스트레이너로 활동했던 선생님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자녀의 성공 가능성을 가늠하는 근거가 된다. 아이들 역시 “잘했다”는 평가는 애초에 기대하지 않는다. 원생들은 “자신의 장점이 뭐냐”고 묻는 기자의 질문에 거의 대답을 하지 못했다. 반면 “가장 자신 없는 부분이 뭐냐”고 물으면 답변이 막힘없이 이어진다.

“아이솔레이션(신체 특정부위를 고립시켜 분리하는 테크닉)이나 손 웨이브 같은 거를 잘 못해요. 그래서 찍은 영상 보면서 계속 공부하고 있어요.”

로비 벽면엔 ‘기획사 합격자’ 명패로 가득
SL 스튜디오 로비에는 기획사에 들어간 이들의 명판과 함께 여러 스타들의 사인이 걸려있다.


아카데미 2층 로비 벽면에는 ‘명예의 전당’이라는 이름의 명패가 줄지어 붙어있다. 명패 안에는 유명 연예기획사에 들어간 원생들의 이름과 기획사가 적혀있다. 소녀시대 태연부터 엑소 카이, 마마무 문별 등 SL스튜디오 이솔림 원장의 손을 거쳤던 스타 제자들의 사진과 친필 사인 장식도 함께 붙어 있다. 입시학원들이 건물에 붙여놓는 명문대 진학 성적과 비슷한 모습이다.

아직 버스와 지하철을 혼자 타지 못해 연습실통학을 함께 하고있는 지민이(왼쪽) 어머니 윤소연 씨(오른쪽).


초등학교 6학년 박지민 군은 1년 9개월 된 원생이다. 평일 주말 가리지 않고 서울 은평구 집에서 엄마와 함께 SL스튜디오를 오간다. 지민이는 얼마 전 한 엔터테인먼트 회사에서 생애 첫 오디션을 봤다. 주어진 시간은 90초. 그 시간 내에 스타의 자질을 증명해내야 했다. 회사 직원들은 지민이에게 가족의 키를 묻거나 앞머리를 들어보라며 이마까지 모두 보이는 얼굴 사진을 찍어갔다. 기획사들은 이런 정보를 토대로 아이가 커서 어떤 모습이 될지 예측한다고 한다.

일요일은 지민이가 수업 없이 혼자 연습하는 날이다. 지민이는 도착하자마자 2층 로비로 올라가 연습실 예약표에 ‘지민’ 두 글자를 적었다. 연습실 공간이 한정돼 있어 아카데미생들은 매 시 50분마다 표에 이름을 적어 연습실을 예약한다. 주말에는 수업이 몰려있고 지방에서 오는 학생들도 있어 이 때가 가까워지면 예약표에 이름을 적으려는 아이들이 줄지어 선다.

가까스로 연습실을 잡은 지민이는 기본기 수업에서 배운 손, 발 뻗기 동작을 한참 반복한 뒤 요즘 배우고 있는 샤이니의 ‘돈콜미’(Don't call me) 안무를 복습했다. 그러곤 바로 보컬 연습실로 옮겨 2시간 넘게 노래 두곡을 수십 번씩 반복했다. 어머니 윤소연 씨는 “재롱잔치 할 거 아니잖아요. 완벽하게 하려고 하는 거니까 하나를 완성하는데도 시간이 많이 걸리죠”라고 했다.

일부 기획사들 “16세 이하만 볼게요”
SM엔터테인먼트 산하 아카데미 시절을 포함해 18년 간 아카데미를 운영해온 이솔림 원장은 아이돌 지망생들의 나이가 부쩍 어려진 것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수업시간 진지한 아이들이 잠시 초등학생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쉬는시간.


“기획사들이 예전엔 초등학생 오디션 보는 것을 꺼려해서 ‘3개월 후에 다시 보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관리를 했어요. 연습생이 되면 SNS나 학교생활도 관리하기 때문에 중 2, 3학년부터 보내달라고 했는데 요즘은 초등학교 5, 6학년부터 뽑기도 합니다. 아예 16세 이하만 보겠다고 하는 기획사도 있어서 좀 더 빨리 준비를 시작하죠.”

부모들이 아이돌 문화에 익숙한 세대라는 점도 아이돌 ‘조기 교육’이 확산되는 이유 중 하나다. 늦어도 중학생 때 기획사에 들어가야 최소 3, 4년 트레이닝을 거친 뒤 10대 후반에 데뷔할 수 있다는 게 부모들 사이에서 이미 상식이 됐다. ‘특목고’를 준비하는 중학생들처럼, 중학생 때를 오디션을 볼 수 있는 마지노선으로 잡을 경우 초등학생 때부터 아이돌 준비에 뛰어들어야 하는 것이다.

기획사 입장에서도 데뷔했을 때 나이가 한 살이라도 젊어야 활동 기간을 1년이라도 늘릴 수 있다. 군 입대를 해야 해 활동 기간에 제약이 있는 남자 그룹의 경우 어린 연습생이 기초까지 탄탄하다면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주요 기획사 오디션에서는 어리지만 상당한 수준의 완성도를 갖춘 연습생들이 ‘바늘 구멍’을 두고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

SL스튜디오에서 보컬 수업을 듣고 있는 초등학생들.


지망생들의 국적도 다양해졌다. 대만, 일본, 중국, 태국 등에서도 한국 기획사의 평가를 받아보기 위해 아카데미의 문을 두드린다. 대만의 유명 예술대를 다니다가 한국에 건너와 동대문시장에서 새벽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틈틈이 연습하거나, 태국 출신으로 한류 콘텐츠 번역으로 돈을 벌며 아이돌 데뷔를 꿈꾸는 원생도 있다. ‘방탄보유국’인 한국에서 제대로 배워서 데뷔해야 세계적 스타로 성장할 수 있다는 인식이 세계 각국에 널리 퍼져있다.

연습은 ‘시 쓰기’로 마무리…“작사 연습해야죠”
어렵게 기획사 연습생으로 뽑힌 뒤에도 데뷔까지는 난관의 연속이다. 데뷔에 성공하더라도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게 대체적인 현실이지만. 많은 10대들이 아이돌로 성공하겠다는 비현실적인 목표를 품고 이 냉혹한 세계로 뛰어든다.

HOT 출신 토니안이 인터뷰하고 있다. 아이돌로 정상을 찍은 그에게도 이 세계의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요인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토니의 팬들이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그 시절 앨범과 사진집 등 굿즈들.


1세대 아이돌 H.O.T. 출신으로 아이돌 육성 아카데미 ‘스테이지 631’를 운영하는 토니안 AL엔터테인먼트 대표는 지망생들에게 특강을 할 때마다 고민이 된다고 한다. 안 대표는 “아이돌 세계는 성공 확률이 너무 낮고 성패가 자신의 의지에 달려있는 것도 아니다”라며 “설혹 성공하더라도 끊임없이 더 큰 성취를 위해 압박받아야 하는 곳”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과거로 돌아가더라도 또 다시 도전하고 싶은 매력적인 세계인 것도 맞다”고 했다.

H.O.T. 화보집 속 자신의 옛 모습을 보며 미소짓고 있는 토니안.


“이렇게 도전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이래서 우리나라가 탑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나라 같은 아시아 사람이 춤과 노래로 세계를 제패할 거란 생각은 누구도 못했을 거예요. ‘BTS 이후 우리 가요계가 어떻게 갈 것 같으냐’는 질문들이 많은데 이 아이들을 보면 알죠. 아이들이 길거리 농구를 많이 하는 미국에서 뛰어난 농구 선수가 많이 나오잖아요. 앞으로도 이런 한류는 지속될 것 같아요.”

2009년생 지민이는 H.O.T.도 토니안도 모른다. 지민이가 친근하게 느끼는 BTS는 미국 빌보드 차트에서 7주 연속 1위를 하고 있다. 지민이는 “왜 아이돌이 되고 싶으냐”는 질문에 “세계 최고가 되고 싶어서”라고 답했다. 어머니 윤 씨는 아이가 상처를 받을까봐 걱정이 되면서도 아직은 괜찮다고 했다.

보컬 연습을 하고 있는 지민이. 발성 연습 후 오디션에 볼 곡을 반복해 부르다 보면 2시간이 훌쩍 흐른다.


“고생해서 잘 되면 좋은데… 살다보면, 똑같이 노력하고 고생해도 뜻대로 안 되는 경우가 훨씬 많잖아요. ‘이게 전부야, 이거 아니면 안돼’라고 하기 보다 ‘지금 이게 좋아서 열심히 하지만 이게 꼭 아닐 수도 있어, 하지만 배운 걸 바탕으로 다른 것도 할 수도 있고 노력해본 경험 자체가 소중할 수 있다는 얘기를 자주 해요.”

지민이 누나는 지민이보다 먼저 아이돌 데뷔를 준비하다 고등학교에 가면서 공부에 전념하기로 했다. 직접 부딪혀보니 데뷔는 어렵겠다며 스스로 결정 내렸다고 한다.

지민이는 매일의 연습을 시 쓰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시 쓰기는 미래에 하게 될지도 모를 작사 연습을 겸한 일이라고 한다. 취재팀과 인터뷰를 한 이날도 지민이는 땀이 식기도 전에 연필을 들었다. 이날 카메라 기자의 셔터 세례를 받았던 자신의 모습이 7행의 시에 고스란히 담겼다.

하루 연습을 마치고 시를 쓰는 지민이. 목에 땀이 흥건하다. 오른쪽은 이날 하루 취재진의 셔터 세례를 받은 지민이가 쓴 시다.


찰칵찰칵

찰칵찰칵 카메라 셔터 누르는 소리
이건 나중에 세계 최고가
돼서 카메라에 잡히는 걸
연습하는 것 가즈아
내 꿈을 향해

뚝뚝뚝뚝
찰칵♡

방탄소년단(BTS)이 미국 빌보드 차트 1위에 올랐다는 소식이 더 이상 놀랍지 않은 시대가 저절로 온 것은 아니다. K팝 아이돌을 세계의 중심으로 끌어올린 동력이 무엇인지 찾다 보면 낯익은 표현과 만나게 된다. ‘메이드 인 코리아(Made in Korea).’

‘한국산 아이돌’은 10대의 젊음을 태워 만들어진다. 연예기획사라는 전문가 집단이 일면식도 없는 연습생들을 모아 합숙 집체훈련을 시키는 방식은 다른 나라에서 유례를 찾기 어렵다. 요즘은 연습생 문턱을 넘으려는 초등학생들이 아이돌 ‘조기 교육’을 받으려 사설 아카데미로 몰려든다. 중학생 때 기획사에 입성해 최소 3, 4년 트레이닝을 거쳐 10대 후반에 데뷔하려면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선행학습을 시작해야 한다.

한 단계씩 올라서며 열망이 뜨거워질수록 적자생존이 지배하는 냉혹한 이 세계로 어린 지망생들은 계속해서 몸을 던진다. 살아남은 소수가 다수의 좌절 위로 한 걸음씩을 내디디며 K팝은 여기까지 왔다. 아이돌을 향한 우리의 시선은 그래서 뜨겁지만 동시에 차갑다. 1996년 H.O.T. 데뷔 이후 25년간 해외 시장을 두드려 BTS 같은 스타를 배출했다는 자부심과 노동집약적 압축 성장을 추구해 온 한국적 상품이라는 비판이 공존한다.

어떻게 바라보든 K팝은 갈수록 뜨거워지고 있다. 끓는점 100도를 향해 마지막 1도를 끌어올리려 분투하는 ‘99℃ 한국산 아이돌’의 세계를 들여다봤다.

동아일보는 창간 100주년을 맞은 지난해부터 지속적으로 히어로콘텐츠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번 히어로콘텐츠팀의 ‘99℃: 한국산 아이돌’은 동아일보가 지켜온 저널리즘의 가치와 경계를 허무는 디지털 기술을 융합한 차별화된 보도를 지향합니다. 기존에 경험할 수 없었던 디지털 플랫폼 특화 보도는 히어로콘텐츠 전용 사이트(original.donga.com)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히어로콘텐츠팀 3기
▽팀장: 김도형 기자 dodo@donga.com
▽기사 취재: 김배중 임보미 위은지 기자
▽사진·동영상 취재: 송은석 기자
▽그래픽·일러스트: 김충민 기자
▽편집: 홍정수 기자
▽프로젝트 기획: 이샘물 이지훈 기자
▽사이트 제작: 디자인 이현정, 퍼블리싱 조동진 김하나, 개발 최경선 박유열

99℃:한국산 아이돌 디지털페이지(https://original.donga.com/2021/kpop1)에서 영상과 더 많은 스토리를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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