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내가 쏜다!’[손진호의 지금 우리말글]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2월 20일 09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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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동아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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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셔라 마셔라 술이 들어간다 쭉쭉쭉쭉쭉~’

술자리가 무르익을 때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흥겨운 가락이 절로 터져 나온다. 눈치 빠른 술꾼은 안다. 드디어 술이 인간을 공격하기 시작했음을. 이때 누군가 자리를 박차며 호기롭게 외친다. “오늘은 내가 쏜다!”

오해 마시길. 코로나19 사태가 터지기 전 회식 등에서 볼 수 있는 흥겨운 광경을 그린 것이다. ‘쏜다’고 큰소리친 그가 그날 술판의 우이(牛耳)를 잡은 건 두말할 필요가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언중이 즐겨 쓰는 ‘쏘다’엔 ‘돈을 내다’라는 뜻이 없다. 활이나 총, 대포 따위를 발사하거나 말이나 시선으로 상대편을 공격한다는 뜻뿐이다. 사전대로라면 ‘(한턱) 쓰다’와 ‘내다’가 있다. 문제는 언중이 말맛에 이끌려 ‘돈을 내다’의 의미로 ‘쏘다’를 꾸준히 쓴다는 점이다. 지금의 말 씀씀이가 계속되면 쏘다에 ‘한턱 쓰다’라는 뜻풀이를 더하는 걸 검토해야 하지 않을까. 언어는 생물과도 같은 것이므로.

쏠 땐 쩨쩨하게 쏘지 말고 ‘거하게’ 한턱 쏘라는 사람도 있다. 한데 우리 말법대로라면 술이든 밥이든 거하게 살 수는 없다. 많은 사람들이 ‘거하다’라고 하면 한자어 ‘클 거(巨)’가 들어간 낱말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낱말은 우리 사전에 없다. ‘거하다’는 ‘산 따위가 크고 웅장하다’ ‘나무나 풀 따위가 우거지다’는 뜻의 순우리말이다. 그러니 술이나 음식과는 눈곱만큼도 관계가 없다.

바른 표현은 ‘건하다’인데, ‘아주 넉넉하다’는 뜻이다. ‘술 따위에 어지간히 취한 상태’를 말하는 ‘거나하다’의 준말이기도 하다. 재미 있는 건, ‘거나하게 취했다’라고 하면서도 ‘건하게 내다’란 말은 입에 잘 올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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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일이 있을 때 남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것을 ‘턱’이라고 한다. 집들이처럼 새집에 들거나 이사했을 때 내는 턱을 ‘들턱’이라고 한다. 돌림턱은 여러 사람이 돌아가며 음식을 내는 턱인데, 그렇게 음식을 내어 함께 먹는 일을 ‘도르리’라고 한다. ‘반살미’는 신혼부부를 친척집에서 초대해 대접하는 일이다. 그런가 하면 한턱낸다고 큰소리치고 실제로는 보잘것없이 내는 ‘헛턱’도 있다.

사람들은 왜 술이 오를 즈음 ‘한턱 쏜다’고 외칠까. 고마운 마음에 대접하려 했다면 조용히 계산을 하면 될 일인데 말이다. 어느 책에선가 “한국인의 강한 주체성 때문”이라고 분석한 글을 보았다. ‘오늘 주인공은 나다. 그러니 나에게 집중하라’는 뜻이란다. 하긴 아무려면 어떤가. 주머니가 가벼운 사람들은 그런 날 부담 없이 취하면 그만이다. 언젠가 “내가 쏜다”를 호기롭게 외칠 날을 꿈꾸며.

songba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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