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든 여성을 ‘무성적 존재’로 보는 편견 깨보고 싶었어요”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8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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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69세’ 임선애 감독 인터뷰

영화 ‘69세’ 메가폰을 잡은 임선애 감독은 각본도 직접 썼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영화 ‘69세’ 메가폰을 잡은 임선애 감독은 각본도 직접 썼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영화 ‘69세’(20일 개봉)는 검은 화면으로 시작한다. 칠흑 같은 화면에 29세 남성 간호조무사 중호(김준경)와 물리치료를 받으러 병원에 온 69세 여성 효정(예수정)의 목소리가 얹힌다. 일상적 대화는 “노인 같지 않으시다” “다리가 예쁘시다”는 중호의 칭찬과 희롱 사이 어딘가의 말로 번진다. 오십견으로 저항할 힘이 없는 효정은 중호에게 성폭행을 당한다. 며칠을 구토와 두통에 시달리던 효정은 중호를 경찰에 고소하지만 ‘젊고 훤칠한 중호가 당신을 성폭행할 동기가 무엇이냐’는 수사기관과 주변의 시선에 부딪힌다. 효정은 투쟁해야 할 대상은 중호가 아니라 사회의 편견임을 깨닫는다.

데뷔작부터 노인 대상 성범죄라는 무거운 주제를 택한 임선애 감독(42)을 24일 서울 마포구 한 카페에서 만났다. ‘오버 더 레인보우’(2002년) 스크립터로 영화계에 입문한 임 감독은 ‘도가니’ ‘화차’ ‘수상한 그녀’ ‘사바하’ 등 작품 수십 편의 스토리보드를 맡았다. 2016년부터 노인 성범죄 사례와 논문을 분석하고 경찰 등 수사기관을 취재해 3년여 만에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2013년 노인 성폭력 사례를 인용한 칼럼을 읽었다. 노인 여성을 무성적(無性的) 존재로 보는 사회적 편견을 악용해 성범죄 타깃으로 삼는 현실이 충격적이었다. 노인 여성 성범죄는 국내외 영화에서 거의 다뤄진 적이 없더라. 창작자로서 남이 하지 않은 것에 대한 갈망과 함께 누군가 운을 떼야 하는 이야기라는 생각도 했다.”

간병인으로 일하는 효정(예수정)은 나이와 직업에 대한 편견에서 자유롭고 싶어서 매 순간 단정하게 옷을 갖춰 입는다. 엣나인필름 제공
간병인으로 일하는 효정(예수정)은 나이와 직업에 대한 편견에서 자유롭고 싶어서 매 순간 단정하게 옷을 갖춰 입는다. 엣나인필름 제공
영화는 인간의 존엄을 이야기한다. 시인으로 존경받던 동인(기주봉)은 “분리수거해야 할 건 쓰레기뿐이 아닌데”라는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의 비아냥거림을 듣고, 효정은 “(피고소인의) 친절이 과했네”라는 경찰의 발언을 감내한다. 무시에 익숙해진 이들은 스스로의 가치를 폄훼한다. 동인은 자신의 시집을 화분받침으로 쓰고, 효정은 자신의 몸에 손을 댔던 환자의 간병인으로 다시 일한다.

“효정이 싸워야 하는 대상은 노년층에 대한 사회의 잘못된 시선이다. 성폭력 피해자뿐만 아니라 누구나 고통과 그늘이 있다. 연대를 통해 스스로의 존엄과 가치를 깨닫는 게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동인은 받침대로 쓰던 자신의 시집을 정성스레 닦고 시를 읽는 효정을 만났기에 다음 시집을 낼 용기를 얻게 되지 않을까.”

성폭행을 당한 후, 유일한 취미인 수영을 하다 팔다리 곧게 뻗은 채 가라앉던 효정은 결국 높은 곳으로 올라선다. ‘심효정, 69세. 병원 조무사 이중호에게 성폭행 당했습니다’라고 적힌 A4용지 수백 장을 양팔에 안고 피해를 당한 병원 옥상으로 한 계단 한 계단….

“죽은 듯 물 밑으로 침잠했던 효정은 병원 계단을 꾸역꾸역 올라 끝내 난간에 선다. 가장 높은 곳에 올라 세상을 향해 고백한다. 누구나 존엄한 가치를 갖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에 대해 자각하고 이야기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69세#영화#임선애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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