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이라는 시간은 감사하는 마음은 더 깊게, 햇살 한 줄기에도 행복을 느끼는 촉수는 더 예민하게 만들었다. 지난달 90세 생일을 맞은 시인은 18번째 시집에서 이런 순간순간을 고이 담아냈다. 시 63편에는 구도자의 자세로 걸어온 그의 삶이 투영돼 있다.
시인은 무심한 듯 지나칠 수 있는 일상을 누리는 그 자체가 축복임을 넌지시 알려준다. ‘내 몸의 뼈의 골수까지도/햇빛 쪼이니/복 받는 일 아닌가/복 받는 거 모른다면/안 되는 일 아닌가.’(‘햇빛 쪼인다’)
산불에 가슴 졸이는 모습에서는 그 무엇이 되었든 생명을 귀히 여기는 마음이 느껴진다. 시간의 흐름 앞에서 소중한 이들을 떠나보낼 수밖에 없음을 온몸으로 깨달았기에 시어는 더 절절해진 게 아닐까. ‘산불이/달리는 군대처럼 지나간 후/개미굴은 무사할까/…/산새들 꿀벌들은 무사할까/…/마지막 한 부스러기의 희망은/남아 있는지/그렇다면 된다/모든 살아 있는 것의 붉은 허파가/맥박 치면 된다’(‘문안·2)
‘젊은 시인들에게·2’에서 ‘분노와 좌절에도/발 구르며 세상을 꾸짖지 말고/허리를 구부려/그 짐을 지거라’고 말하는 건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은 행동으로 묵묵히 실천하는 한 명 한 명에게 있음을 따뜻하고도 위엄 있게 당부하는 듯하다.
속마음을 아이처럼 천진하게 드러내는 대목에서는 빙그레 웃음이 나온다. 삶을 관조하는 여유로움이 이런 고백도 가능케 했으리라.
‘시계가 나에게 묻는다/그대의 소망은 무엇인가/내가 대답한다/내면에서 꽃피는 자아와/최선을 다하는 분발이라고/그러나 잠시 후/나의 대답을 수정한다/사랑과 재물과/오래 사는 일이라고//시계는/ 즐겁게 한판 웃었다.’(‘시계’)
정갈하게 써 내려간 문장을 천천히 읽다 보면 어느새 마음이 고요해지고 맑아진다. 삶에 대한 긍정과 사랑에 대한 염원을 노래한 작품들은 그가 세상을 향해 내민 선물 보따리 같다. 첫 시집 ‘목숨’(1953년)을 낸 후 64년째 시를 쓰는 시인은 “가능하다면 이후에 또 한 권의 시집을 펴내고 싶다”고 했다. 영원한 현역을 꿈꾸기에 그는 여전히 청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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