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아흔 살 시인이 세상에 내민 선물 보따리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0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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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만한 사랑/김남조 지음/174쪽·1만2000원·열화당

김남조 시인은 “만년의 으스름 저문 날을 살면서도, 보고 느끼고 깨닫고 감동하는 바에서는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동아일보DB
김남조 시인은 “만년의 으스름 저문 날을 살면서도, 보고 느끼고 깨닫고 감동하는 바에서는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동아일보DB
90년이라는 시간은 감사하는 마음은 더 깊게, 햇살 한 줄기에도 행복을 느끼는 촉수는 더 예민하게 만들었다. 지난달 90세 생일을 맞은 시인은 18번째 시집에서 이런 순간순간을 고이 담아냈다. 시 63편에는 구도자의 자세로 걸어온 그의 삶이 투영돼 있다.

시인은 무심한 듯 지나칠 수 있는 일상을 누리는 그 자체가 축복임을 넌지시 알려준다. ‘내 몸의 뼈의 골수까지도/햇빛 쪼이니/복 받는 일 아닌가/복 받는 거 모른다면/안 되는 일 아닌가.’(‘햇빛 쪼인다’)

산불에 가슴 졸이는 모습에서는 그 무엇이 되었든 생명을 귀히 여기는 마음이 느껴진다. 시간의 흐름 앞에서 소중한 이들을 떠나보낼 수밖에 없음을 온몸으로 깨달았기에 시어는 더 절절해진 게 아닐까. ‘산불이/달리는 군대처럼 지나간 후/개미굴은 무사할까/…/산새들 꿀벌들은 무사할까/…/마지막 한 부스러기의 희망은/남아 있는지/그렇다면 된다/모든 살아 있는 것의 붉은 허파가/맥박 치면 된다’(‘문안·2)

‘젊은 시인들에게·2’에서 ‘분노와 좌절에도/발 구르며 세상을 꾸짖지 말고/허리를 구부려/그 짐을 지거라’고 말하는 건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은 행동으로 묵묵히 실천하는 한 명 한 명에게 있음을 따뜻하고도 위엄 있게 당부하는 듯하다.

속마음을 아이처럼 천진하게 드러내는 대목에서는 빙그레 웃음이 나온다. 삶을 관조하는 여유로움이 이런 고백도 가능케 했으리라.

‘시계가 나에게 묻는다/그대의 소망은 무엇인가/내가 대답한다/내면에서 꽃피는 자아와/최선을 다하는 분발이라고/그러나 잠시 후/나의 대답을 수정한다/사랑과 재물과/오래 사는 일이라고//시계는/ 즐겁게 한판 웃었다.’(‘시계’)

정갈하게 써 내려간 문장을 천천히 읽다 보면 어느새 마음이 고요해지고 맑아진다. 삶에 대한 긍정과 사랑에 대한 염원을 노래한 작품들은 그가 세상을 향해 내민 선물 보따리 같다. 첫 시집 ‘목숨’(1953년)을 낸 후 64년째 시를 쓰는 시인은 “가능하다면 이후에 또 한 권의 시집을 펴내고 싶다”고 했다. 영원한 현역을 꿈꾸기에 그는 여전히 청춘이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충만한 사랑#김남조#햇빛 쪼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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