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장롱면허 들고… 2001년식 중고차 몰고… 16000km 대장정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0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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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용감한 자매 38일간의 몽골랠리

심희연·희린 자매가 결성한 랠리팀 ‘희린이가 가재’가 2001년식 998cc ‘스즈키짱’을 타고 몽골 평원을 달리고 있다(위 사진). 8월 23일 38일간의 ‘몽골랠리’를 완주한 후 결승지점인 러시아 ‘울란우데’에서 랠리를 함께한 자동차에 올라 태극기를 흔들고 있는 희연 씨(왼쪽)와 희린 씨. 불스원 제공
심희연·희린 자매가 결성한 랠리팀 ‘희린이가 가재’가 2001년식 998cc ‘스즈키짱’을 타고 몽골 평원을 달리고 있다(위 사진). 8월 23일 38일간의 ‘몽골랠리’를 완주한 후 결승지점인 러시아 ‘울란우데’에서 랠리를 함께한 자동차에 올라 태극기를 흔들고 있는 희연 씨(왼쪽)와 희린 씨. 불스원 제공
 “우리 치료해 주려고 데려온 거 아니었어? 왜 자꾸 이상한 걸 물어보지?”

 “나도 잘 모르겠어. 말도 잘 안 통하는데….”

 아침부터 진흙에 빠진 차를 밀다가 ‘허리가 나가’ 드러누워 버린 희연을 차에 두고 도움을 청하러 나갔던 희린. 근처를 지나던 러시아 군인들이 차를 꺼내주고 치료도 해줘 ‘구세주’라고 생각했던 것도 잠시였다. 군부대에서 누구냐, 왜 왔냐, 직업이 뭐냐 등등 5시간이 넘게 신문을 받다 보니 영혼이 가출해버릴 지경이었다.

 “희린아, 카자흐스탄 쪽으로는 다신 가지 말자….”

 이들은 2001년식 스즈키에 몸을 싣고 약간 북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8월 13일 유라시아 횡단 랠리팀 ‘희린이가 가재’는 카자흐스탄 국경 지역을 달리다 러시아 군인들에게 ‘연행’되는 위기를 겪는다. 무슨 랠리팀이 2001년식 차를 타고 군인들에게 연행되느냐고? 그게 다 사연이 있다. 이건 올해 ‘몽골랠리’의 유일한 한국 참가자 심희연(26)·희린(24) 자매의 이야기다.

즉흥적으로 결정한 1만6000km 여행길

 “몽골랠리 가보지 않을래?”

 영국 치체스터에서 러시아 울란우데까지 38일에 걸친 1만6000km의 여행(또는 생고생)은 이 한마디에서 시작됐다. 에어컨도 안 나오는 중고차에 몸을 싣고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한 여정. 여름에 베를린에 있는 친구에게 놀러 가기로 약속했고, 동시에 미국인 친구 스테파니에게도 같이 몽골 여행을 가자고 ‘중복 약속’을 해버리는 바람에 이를 해결하기 위해 생각해낸 묘수가 바로 ‘몽골랠리’였다. 3년 전 여행 중 “이런 대회가 있다”는 말을 들었던 것이 문득 생각나 인터넷을 뒤져 랠리에 대해 알아냈다.

 동생 희린은 언니 희연에게 “가자”고 했고, 희연은 “그래”라고 해서 랠리팀이 결성됐다. 팀명은 희린이가 가자고 한 것이므로 ‘희린이가 가재(Heereen said let's go)’로 정했다. ‘지금 아니면 언제 해보겠느냐’는 생각에 어찌 보면 팀명만큼이나 장난스럽게 시작한 여행이지만, 그 과정은 결코 장난이 아니었다.

 일반인에게는 존재도 생소한 ‘몽골랠리’는 영국의 비영리단체 ‘어드벤처리스트’가 주최하는 레이스 대회다. 그런데 여느 랠리처럼 누가 더 빨리 목적지에 들어오느냐를 겨뤄 순위를 정하는 대회가 아니다. 정해진 것은 출발점(치체스터)과 목적지(울란우데), 그리고 ‘늦어도 언제까지는 와라’는 것뿐. 코스도 기간도 방식도 팀이 알아서 정하면 된다.

 단, 세 가지 규칙이 있다. 1. 누적주행거리 10만 km 이상의 1200cc 미만 중고차 혹은 125cc 미만의 스쿠터만 이용할 것. 2. 랠리 도중 일어나는 문제들을 스스로 해결할 것. 3. 환경을 보호할 것.

 재밌을 거 같아 해보자고는 했지만 희린은 대학원생이고 희연은 취업 준비 중. 참가비는 물론이고 랠리용 중고차를 사는 일까지 외부의 도움 없이는 랠리를 준비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때 희연이 광고 관련 수업에서 들었던 ‘불스원’을 떠올렸다. 수명이 거의 다한 엔진으로 거친 도로를 달려야 하는데, 엔진 성능을 보호하며 배출가스를 줄여주는 제품을 판매하는 회사니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메일 한 통에 후원은 ‘덜컥’ 이뤄졌다. 오래된 엔진으로 거친 도로를 달려야 하고, 환경을 보호하자는 대회 취지가 회사의 주력 제품인 ‘불스원샷’과 잘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한 불스원이 선뜻 후원에 나서기로 한 것. 본격적인 대회 준비가 시작됐다.

 가장 어려운 일은 한국에 있으면서 해외에서 중고차를 구매하는 일. 게다가 두 자매는 운전 경력이 많지도 않았다. 둘 다 스무 살 즈음 면허를 따긴 했지만 희연은 ‘장롱면허’였고, 희린은 그간 총주행거리가 이번 대회 중 가야 할 거리의 절반도 안 될 정도. 차에 대해 문외한이나 다름없었다.

 인터넷을 뒤지고 뒤져 독일의 한 중고차 거래 사이트를 찾았고, 이곳을 통해 관련 서류 등을 받고 보내며 2001년식 스즈키 스위프트 모델의 중고차를 살 수 있었다. 배기량 998cc에 누적주행거리는 14만9900km. ‘스즈키짱’이라 부르기로 한 이 차를 베를린의 카센터에서 정비 받으려고 하니 직원이 “멀쩡한 차를 다시 사는 게 어떻겠느냐”고 했다. 간단한 정비를 마친 후 랠리 출발지인 영국에 도착했고, 여기서는 한국에서 날아온 불스원의 엔진관리팀이 랠리가 가능하도록 엔진을 정비해줬다. 현지 시간 7월 17일. 영국 치체스터에서 300여 개의 다른 참가팀과 함께 ‘대륙’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씻지 못하고 에어컨 없어도, 풍경·사람에 빠져들어

 중간중간 어려움이 있으리라고는 예상했지만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 랠리 시작 첫날, 영국에서 프랑스로 건너가기 위해 카페리를 예약해 뒀는데, 예상보다 길어진 랠리 시작 행사 때문에 페리를 놓친 것. 46파운드(약 6만5600원)를 더 내고 다음 배편을 타긴 했지만, 첫날부터 순탄치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희린이가 가재’ 팀은 북유럽을 거쳐 러시아로 가는 경로를 잡았다. 참가자들이 모두 즐기는 피트스톱(경주차가 정비를 위해 차고에 들어오는 것) 파티가 열리는 독일 하이델베르크를 거쳐 북유럽에 입성했다. 내비게이션이 있을 리 없는 스즈키짱이기 때문에 스마트폰의 구글지도 애플리케이션으로 위치를 파악하며 달렸다. 덴마크에서는 한 치 앞도 가늠하기 힘든 폭우를 만나기도 하고, 스웨덴에서는 주차딱지를 끊기기도 했다. 근데 주차딱지를 끊은 단속원이 ‘스즈키짱’에 붙은 팀의 페이스북 주소를 보고는 거기에 손가락으로 ‘V’자를 그리며 ‘인증샷’을 남겨 두 자매는 황당한 웃음을 짓기도 했다.

 여름철에 오전 4시면 해가 뜨는 북유럽은 또 하나의 복병이었다. 스즈키짱은 에어컨이 작동하지 않기 때문. 변변한 숙소도 구하지 못하고 차에서 숙식을 해결할 일이 많았던 희연·희린 자매는 오전 4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쨍쨍한 햇살과 싸워야 했는데, 아무리 창문을 연다고 해도 에어컨 없이 달리는 것은 고역이었다. 그나마 북유럽이 습하지 않고 건조해서 땀이 금방 식는 것이 다행이었다.

 제대로 씻는 것도 포기하고 식사도 슈퍼마켓 음식으로 때워야 할 때가 다반사였지만, 곳곳에서 보이는 아름다운 풍경은 여행의 고단함도 잊게 했다. 스웨덴 북부 시골마을의 주유소에서 동양 사람은 만나보지도 못했을 것 같은 남자가 한국말로 말을 걸어와 점심을 함께 먹은 것도 잊지 못할 기억이다(그는 선교사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유럽의 북쪽 땅끝 마을인 ‘노르캅’을 가는 도중에는 야생 순록 떼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유럽의 최북단을 ‘정복’한 기념으로 핀란드 숲속 사우나에 들렀을 때는 세상을 다 가진 기분. 랠리 18일 만에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해 중국요리를 먹으며 본격적으로 유라시아 대륙을 내달릴 준비를 했다.

타이어 휠캡 빠지고 러시아 군인에게 잡혀가고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붉은광장과 ‘바실리 성당’(일명 테트리스 성)에 눈도장을 찍은 자매는 본격적으로 비포장 길에 접어들었다. 험난한 도로만큼이나 고생길도 본격 시작이었다.

 첼랴빈스크, 예카테린부르크, 옴스크, 바르나울 등 이름도 생소한 러시아의 내륙지방을 향해 지평선을 달리는 날이 며칠간 이어졌다. 끝도 없이 펼쳐진 지평선에서 떠오르는 태양은 볼 때마다 장관이었다. 더위를 빼고는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하지만 결국 스즈키짱에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우랄 산맥을 보며 사막을 달리던 도중, ‘덜컹’ 하는 소리가 났다. 알고 보니 타이어의 휠캡이 빠져버리고 만 것. 당황하긴 했지만 일단 불스원 기술교육팀에 연락해 휠캡이 없어도 주행은 할 수 있다는 설명을 듣고 랠리를 이어갔다. 하루에 500∼700km씩 달리다 보니 권장 주기보다도 자주 ‘불스원샷’을 넣어주며 엔진이 버텨 주기만 기도했다.

 최고의 고생은 28일째에 찾아왔다. 전날 밤 페르세우스 유성우를 보며 감상에 젖을 때만 해도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다. 아침에 카자흐스탄 국경지역에서 진흙에 빠진 차를 못 빼내 고생하고 있는데 러시아 군인들의 도움을 받게 된 것. 하지만 국경지대이다 보니 이들을 수상히 여긴 군인들은 자매를 5시간이나 잡아두며 ‘취조’를 했고, 이후 차를 빼내느라 허리를 다친 희연은 주변 병원에서 진통제 주사를 맞아야 했다. 그나마 러시아 병원이 외국인에게도 ‘공짜’인 데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친절했던 것이 위안거리랄까.

 대회 이름 자체가 ‘몽골랠리’인 만큼 몽골을 지나칠 순 없었지만 여기도 난관은 있었다. 올해부터 몽골 정부가 국경에서 몽골랠리 참가 차량을 대상으로 5000달러(약 551만7500원)의 ‘보증금’을 부과한다는 소식이 들려온 것. 보증금 명목이라지만 언제 돌려받을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노릇이라 많은 팀이 몽골 진입을 포기하고 돌아가는 경우가 속출했다. 학생인 데다 후원을 받아 참가한 두 사람에게도 5000달러는 도저히 내기 힘든 금액이었다.

 결국 ‘꼼수’를 찾았다. 차에 붙은 ‘몽골랠리’ 스티커를 떼고 무사히(?) 몽골에 진입할 수 있었던 것. 몽골의 도로 사정은 러시아보다도 더 열악했다.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으로나 달릴 수 있을 것 같은 도로를 무사히 견뎌준 스즈키짱이 고마울 따름. 하지만 초원을 5시간 달려 강을 건너기 위해 다리를 찾았는데 그 다리가 무너진 상태여서 다시 5시간을 되돌아갈 때의 허탈함이란…. 그래도 중간에 들른 슈퍼마켓에서 진열된 한국음식을 만났을 때의 반가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울란바토르를 지나 몽골의 북쪽 국경을 넘어 다시 러시아에 진입했고, 드디어 대회 38일째인 8월 23일! 결승지점인 울란우데에 닿았다. 스즈키짱 위에 올라서 태극기를 흔들며 기쁨을 만끽했지만, 동시에 실감이 잘 나지 않는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스스로 경로 정하는 랠리, 우리 삶 같지 않나요?”

 “아침에 눈뜨자마자 지금 있는 곳이 어딘지, 오늘은 어디로 얼마나 가야 하는지 생각하다가 그런 것들이 사라지니 며칠간은 실감이 안 났어요. 정말? 다 끝났나? 아직도 내가 랠리를 한 게 맞나? 하는 생각을 해요. 조금 얼떨떨하지만, 여행을 많이 다닌 저희로서도 정말 최고의 여행이었어요.”

 한국에 돌아와 초췌해진 몰골을 벗어던진 두 사람은 다시 예전 생활로 돌아갔다. 하지만 38일간 봤던,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던 풍경과 신기하게 한국말로 인사를 건네던 유럽 사람들, 사막모래에 빠진 차를 꺼내주던 몽골 사람들과의 추억은 잊지 못할 기억이다. 아, 레이스를 마치고 수명을 다한 스즈키짱은 결승점에서 주최 측이 수거해 이별을 고했다.

 “출발점과 도착점만 정해져 있다는 것이 가장 매력적이었어요. 순위 경쟁도 아니고, 과정을 자신에게 맞게 직접 계획하고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바꿀 수도 있죠. 랠리처럼 삶의 과정도 제가 원하는 대로 만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자매는 이제 국내 자동차여행을 계획 중이다.

김성규기자 sunggyu@donga.com
#몽골랠리#어드벤처리스트#레이스 대회#불스원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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