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누아 드 라 당스’ 남성무용수상 발레리노 김기민, 소감은…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5월 18일 20시 05분


코멘트
“나 상 탔음.”

발레리노 김기민(24)이 18일 새벽 아버지 김선호 씨에게 보낸 문자메시지다. 별 것 아닌 상처럼 보이지만 그가 탄 상은 ‘무용계의 아카데미상’으로 불리는 ‘2016 브누아 드 라 당스(Benois de la Danse)’ 최고 남성무용수상이다. 한국 남자 무용수로는 처음이다.

이 상의 조직위원회는 17일(현지시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러시아 마린스키발레단의 수석 무용수인 김기민의 수상 사실을 밝혔다. 1992년부터 매년 시상식을 열고 있는 이 상은 세계 직업 무용단에서 활동하는 톱클래스 무용수와 안무가가 심사 대상이다. 실비 귀엠, 줄리 켄트 등 세계적인 발레 스타들이 이 상을 수상했다.

한국인 무용수로는 강수진 국립발레단 단장(1999년)과 김주원 성신여대 교수(2006년)가 각각 최고 여성 무용수상을 받은 바 있다. 남자 무용수로는 김현웅(2006년), 이동훈(2012년)이 후보에 올랐으나 수상하지 못했다. 김기민은 2011년 동양인 발레리노로는 처음으로 세계 최정상급인 마린스키발레단에 입단해 3년여 만에 수석 무용수로 승급했다. 중학교 졸업 뒤 영재로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에 입학한 그는 각종 국제 대회를 석권했다. 형인 김기완(27)도 국립발레단 주역 무용수다.

18일 모스크바에서 시상식 뒤 숙소가 있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 그와 전화통화를 했다.

-수상 소감을 말해 달라.

“기대를 많이 안하고 시상식에 갔다. 이 상이 중요하고 뜻 깊지만 무용수가 실력이 없거나 앞으로 공연에서 좋지 않은 모습을 보인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공연이 정말 많은데 공연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어서 솔직히 수상 기대는 하지 않았다. 뜻밖이다. 앞으로 부담감이나 두려움보다는 조금 더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겠구나는 생각이 든다.”

-후보에 오르게 한 ‘세헤라자데’와 ‘라 바야데르’가 의미가 깊겠다

“‘세헤라자데’와 ‘라 바야데르’는 내 발레 인생에서 중요한 작품이다. 이야기가 많다. 정말 아팠던 날에도 공연을 했고, 다리를 다쳤을 때도 꾹 참고 공연을 했다. 아메리칸발레시어터와 파리오페라발레단의 데뷔 무대작품이기도 하다. 여러가지 감정을 겪으면서 공연했던 작품이어서 매 공연 때마다 다른 것, 새로운 것을 표현할 수 있었다. 힘들었던 시간이 약이 되어 그 어떤 작품보다 자신감 있게 표현할 수 있는 작품이 되지 않았나 싶다.”

-수상으로 한국의 후배 무용수들에게 어떤 영향을 준 것 같나?

“어떤 곳을 가는 길이든 그 길을 먼저 걸어본 사람이 없다면 그 길을 찾기도 걷기도 힘들다. 가는 방법만 알면 쉬운데 그 길을 안내해 주는 사람이 없어 어렵게 가는 사람도 많다. 흑인으로 세계 최초로 영국 왕립 발레단에 입성한 쿠바 출신의 카를로스 아코스타가 있다. 아코스타가 있기 전까지는 흑인 무용수에 대한 선입견이 많았다. 하지만 그가 등장하면서 사람들의 시선이 바뀌었다. 이어 많은 흑인 무용수들이 배출됐다. 나에게 맡겨진 역할도 그런 역할이 아닌가 싶다. 한국 후배들에게, 한국 발레계를 위해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계속 도전하고 싶다.”

-처음 러시아에 왔을 때 많이 힘들었을 것 같다.

“처음에는 러시아 사람들이 편견 어린 시선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마린스키발레단의 첫 동양인 무용수에다 최초의 수석 무용수다. 하지만 내가 공연을 하면 할수록 러시아 사람들의 나에 대한 이미지, 그리고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바뀌는 것을 느꼈다. 이제 러시아에 온지도 5년이 넘었는데 처음 왔을 때와는 나에게 보여주는 관심이나 태도가 다르다고 생각한다. 후배들이 마린스키발레단과 러시아에 오더라도 어깨를 펴고 뿌듯하게 맞아줄 수 있을 것 같다.”

-입단한 뒤 정작 한국에서는 공연을 하지 못했다.

“나도 한국 관객이 그립다. 한국에 한 번 이상 가봤던 단원들도 한국을 좋아한다. 정말 아름다운 도시에 아름다움 사람이 있는 곳이라고 말한다. 언제 한국에 갈 수 있는지 자주 묻는다. 다만 한국에서는 ‘백조의 호수’ 한 작품으로만 초청하려고 한다. 마린스키발레단이 보유한 재미있는 레퍼토리가 많다. 유명한 작품들을 한국에 보여주지 못한는 것이 아쉽다.”

-수상을 통해 한국 발레를 해외에 널리 알렸다고 생각하나?

“현재 소속은 마린스키발레단이지만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을 달고 무대에서 춤을 춘다. 해외 언론과의 인터뷰 때도 ‘한국인’이라는 것을 일부러 알린다.”

-앞으로의 목표는 무엇인가?

“새로운 목표보다는 내가 하고 싶은 작품으로 무대에 오르고 싶다. 발레단에서 많은 작품들을 해봤지만 아직 못해본 작품들도 많다. ‘로미오와 줄리엣’, ‘파르크’, ‘젊은이와 죽음’ 등 여러 가지 작품들을 경험해보고 싶다. 무용수에게 새로운 작품을 접하는 것은 가장 힘든 일이면서도 기쁜 일이다. 새로운 작품을 만나는 것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느낌이다. 흥분되면서 공연을 끝낸 뒤의 성취감은 말로 표현하지 못한다. 그런 성취감을 계속 느끼고 싶다.”

-해외 발레단에 도전하고 싶은 후배들에게 조언을 한다면?

“사람들이 나를 보면 부러워하면서 ”넌 왜 모든 일이 잘되지?‘하고 묻는다. 나는 내가 잘 되는 이유는 잘 안되는 상황을 더 많이 겪어봤기 때문이라고 대답하고 싶다. 할까 말까 고민하지 말고 일단 부딪혀봤으면 좋겠다. 도전을 시작도 하기 전에 두려워하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계속 부딪히고 경험해봐야 스스로 느낄 수 있다. 내가 잘 한다고 평가받는 ’라 바야데르‘도 수많이 실패해봤다. 공연 도중 넘어진 적도 있고, 감정이 무너져 자책했던 적도 있다. 공연을 준비하다가 부상을 당해 공연을 하지 못한 적도 있다. 그래도 계속 도전했고 지금 이 자리에 설 수 있었던 것 같다. 후배들이 많이 경험해 보고, 많이 느끼고, 많이 실패해 봐야 그 다음이 있지 않을까 싶다.“

그는 새벽 시간 긴 이동 끝에 집에 도착했다. 피곤할 법도 했다. ”힘들 테니 쉬세요“라는 하자 그는 무심히 대답했다. ”연습하러 가야죠.“ 그냥 타는 상은 없다.

김동욱 기자 creating@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