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석의 시간여행]1896년 1월 1일 태양력 시행, 낯선 시간 속으로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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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1월 1일, 조선의 사람들은 얼떨떨한 새 아침을 맞았다. 어제는 동짓달 열엿새, 즉 음력 11월 16일이었다. 그러므로 오늘은 늘 그랬듯이 열이레인 11월 17일이 된다. 그런데 1월 1일이라 한다. 무슨 말인가.

양력이라 했다. 국제 기준에 맞추어 양력 사용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한다. 미국을 시작으로 서방 6개국과 수교가 완료된 지 10여 년, 이제 낯선 시간으로 들어서는 것이었다. 갑오와 을미년의 정신없는 난리를 거치고 예측불허의 병신년을 앞둔 이 땅의 사람들은 졸지에 서양 시간에 편입됨으로써 또 하나의 혼돈을 마주하게 되었다. 120년 전 이맘때였다.

일본도 그리된 지 20년이 넘는다고 한다. 중국도 언제 어찌될지 모른다. 이래저래 조선은 중국에서 멀어져 일본과 서양으로 다가가는 시절이었다. 중국에서 도입하여 기나긴 세월 써온 음력의 역법(曆法)은 청일전쟁의 포화가 멎고 국모가 시해된 을미년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공식 폐기된 것이다.

새로 쓰는 책력(冊曆)에는 여전히 음력 날짜가 있고 그 아래 양력 날짜가 새로 병기된다. 하지만 정부와 공공기관에서는 양력이 우선이다. 민간에서는 종전처럼 음력을 사용하고 명절도 음력으로 쇤다지만 시간은 되돌릴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이다.

이리하여 동짓달의 남은 열나흘과 섣달 한 달은 쇠지도 못하고 허공에 사라졌다. 44일을 남겨두고 을미년은 조기에 하차했다. 마흔넷의 생애를 뒤로하고 허공으로 흩어진 왕비의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매일같이 추모만 하고 있은 지 3개월이 다 되었다.

강제로 맞은 새해 아침에 경복궁의 왕은 빈전(殯殿)에 나아가 죽은 왕비를 위한 삭전(朔奠)을 올렸다. 매달 초하룻날 아침에 지내는 제사였다. 음력 초하루에 제사를 올린 지 갓 보름이 지났지만 양력 1일에 맞추어 또 제사를 올리게 된 것이었다. 기괴한 죽음을 당한 명성황후는 사후에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제사마저 교란당하는 기구한 처지에 놓였다.

단군 이래 처음이라 할 양력 제사를 올리고서 임금은 외국 사절들을 접견했다. 양력 신년 하례식이었다. 이것도 이전의 왕들에게는 없던 행사였다. ‘건강은 어떠시냐’고 새해 안부를 묻는 외국 공사들에게 임금은 “한결같으오”라 대답했다. 상중에 임금은 상투를 자르고 나왔다. 이날부터 시행에 들어가는 단발령 공포를 앞두고 그제 솔선하여 모범을 보인 것이라 했다. 이제는 복장도 외국식으로 해도 무방하다는 새로운 복식제도가 이날 아울러 공포됐다. 두발이 서양식이 되는 마당에 재래식 관복을 고수할 수 없는 일. 1896년 1월 1일은 시간의 질서와 더불어 두발과 복식의 규범이 송두리째 뒤바뀌는 신기원의 날이었다. 이 모든 것이 국왕의 자발적 의사는 아닌 듯했다. 어찌되었건 환갑을 두 번 지난 지금 여기 우리가 사는 일상의 기본 꼴을 이루는 출발점이 되었다.

이날부터 건양(建陽)이라는 연호도 사용되었다. 태양력을 기해 독자적인 새 연호가 필요해진 것이었다. 어제까지 장구한 세월 써온 중국의 연호는 이날부로 태음력과 함께 공개석상에서 사라졌다. 중국의 시간은 조선에서 걷히었다. 조선의 왕과 백성은 이제 중국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났다고 생각했다. 중국의 칙사를 영접하던 영은문을 허물고 병자호란의 유물인 삼전도비도 쓰러뜨린 을미년이었다.

그래도 설날은 예전처럼 변함없이 음력의 정월 초하루에 올 것이었다. 위에서는 새로운 양력의 시간이 돌고, 아래서는 관습인 음력의 시간이 도는 세월이 개시되었다. 작년 설날은 동학과 청일전쟁의 난리 끝에 지나갔다. 올해의 설은 또 어찌 맞게 될 것인가. 그렇게 난생 처음의 양력 새해를 맞고 41일이 지난 뒤 왕은 일본이 장악한 경복궁을 빠져나가 러시아공사관으로 들어갔다. 음력으로 12월 28일, 설날을 이틀 앞둔 이른 아침이었다. 왕은 다시는 왕비의 제사를 양력으로 올리지 않았다.

이로부터 근 10년 뒤인 을사년의 양력 11월 17일에 나라는 망국으로 접어드는 조약에 조인했다. 그리고 5년 뒤 한일강제병합과 함께 양력이 전면 시행되었다. 설날도 양력으로 굳어졌다. 그리고 일본의 연호가 사용되었다. 음력설과 더불어 쇠락한 왕의 존재도 10년을 못가 사라졌다. 민족 스스로 타도한 적 없는 왕조는 일제 통치가 끝난 후에도 회복되지 않았다. 음력설은 광복 40년이 지나 비로소 공휴일이 되면서 복권되었다. 나라의 이름은 대한민국이었고 국가의 정체는 민주공화국이며 정권의 주체는 전두환 정부였다. 태음력이 퇴조하던 을미년으로부터 90년이 지난 때였다.

그 후 30년을 더해 우리의 시간은 양력 전환 120년을 맞는다. 양력 해가 바뀌자마자 음력 개념인 병신년이 이구동성 거론되는 것을 보면, 음력과 양력이 아직 불가분의 관계로 우리의 시간에 엮이어 있나 보다. 불가역도 있고 불가분도 있다.

박윤석 역사칼럼니스트·‘경성 모던타임스’ 저자
#태양력#조선#양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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