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본관 의미 줄자 거주지 표기 제2본관 등장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4월 23일 03시 00분


코멘트

한국고전번역硏 안광호 연구원 논문

우리나라의 성씨는 모두 286개(2000년 인구주택 총 조사 기준). 중국(8155개)의 3.5%밖에 안 된다. 하지만 4179개나 되는 ‘본관(本貫)’을 감안하면 얘기는 달라진다. 성씨가 같아도 본관이 다르면 별개의 씨족으로 보는 관습을 따르면 사실상 성씨가 4000개가 넘어 중국의 절반에 육박하게 된다.

‘사학연구’ 최신호에 실린 한국고전번역연구원 안광호 연구원의 논문 ‘전통기 한중 성씨제도를 바라보는 두 지식인의 시각’은 중국 송대의 학자 정초(鄭樵·1104∼1162)와 조선 후기 실학자 반계 유형원(1622∼1673)의 시각차를 통해 중국과 다른 우리 성씨·본관제도의 특징을 보여준다.

중국은 삼국시대와 위진시대까지 씨족의 거주지인 지망(地望)과 성씨를 족보에 함께 쓰다가 송나라 때 들어 지망 대신 해당 인물의 거주지나 관직(벼슬을 한 경우)을 족보에 쓰기 시작했다. 문벌귀족 대신 사대부가 지배 세력으로 들어서면서 문벌을 숭상하는 풍토가 누그러진 영향이 컸다.

한반도에선 통일신라시대까지 성씨만 쓰다가 고려시대가 되면서 지망에 해당하는 ‘본관(本貫)’제도를 도입했다. 애초 본관은 곧 같은 성씨가 모여 사는 씨족 거주지를 뜻했다. 하지만 조선시대 들어 한양 등 대처로 인구 이동이 많아지면서 본관이 일평생 한 번도 못 가본 지역이 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유형원이 ‘동국여지지’(1656년·사진)의 인물을 기술하면서 본관(선조의 거주지)이 아닌 본적(해당 인물의 출생지)별로 구별한 것도 사회적 의미가 퇴색한 본관제를 비판적으로 봤기 때문이었다. 유형원은 “본관은 단지 그 가문의 기원지를 밝히는 구실을 할 뿐이다. 그런데도 저들을 마치 그 본관지의 출신인물인 양 그곳 지지에 싣는다면, 이는 사실을 속이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조선시대에는 본관제의 이런 한계를 보완하려 같은 씨족이라도 거주지가 달라지면 사실상 다른 씨족으로 보는 이른바 ‘제2본관’이 출현하기도 했다. 전주 이씨에서 분화된 둔덕(屯德) 이씨가 대표적. 둔덕 이씨는 태종의 둘째아들 효령대군의 증손자(전주 이씨)가 전라도 남원부 둔덕으로 이주한 뒤 그 후손을 부르는 호칭이 됐다. 남양 홍씨도 경기 여주목 이포(梨浦)에 정착한 후손은 이포 홍씨, 전라도 남원부 괴정(槐亭)에 정착한 이들은 괴정 홍씨로 분화됐다.

하지만 제2본관을 쓴 이들이 족보에 적힌 본관의 지명까지 바꾼 것은 아니었다. 안 연구원은 “우리 민족은 ‘○○(지역명)人’의 의미를 중국과 달리 시조의 원적(본관)에 따라 변치 않는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족보의 지명까지 바꾸는 것으로 나가지는 않은 걸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우정렬 기자 passion@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