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낡지 않는 건 괴물밖에 없어”… 죽는 건축 제안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4월 5일 03시 00분


코멘트

日 스타건축가 구마 겐고 자서전
◇나, 건축가 구마 겐고/구마 겐고 지음·민경욱 옮김/344쪽·2만 원·안그라픽스

오카다 준야 제공
오카다 준야 제공
베이징 홍콩 미얀마 찍고, 파리 에든버러 뉴욕….

일본 건축가이자 도쿄대 교수인 저자(60·사진)는 세계 곳곳에 벌여둔 설계 작업을 위해 ‘세계일주 티켓’이라는 특별 할인 항공권을 이용한다. 일반 요금에 비해 훨씬 싼 이 티켓 일정에 맞춰 출장 계획을 짠 뒤 지구 위를 빙빙 도는 것이 일상이다.

구마 교수의 이 자서전을 보면 일명 스타키텍트(star architect)라 불리는 스타 건축가들의 삶은 화려하기보다 고달파 보인다. 세계 이 도시 저 도시를 다니며 “‘설계경기’에 참여하는 경주마 같은 신세”라는 말이 엄살로 들리지 않는다.

특히 각국에 대한 인상 평이 흥미로운데 중국의 관료주의를 비판하는 내용은 ‘건축계의 큰손에게 이렇게 솔직해도 되나’ 싶을 정도다. “중국 공무원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는 방법이 매우 정교하다.… 중국에는 애당초 객관적인 기준이라는 게 없다. 프로젝트마다 담당 공무원과 교섭하는데 그 과정에서 공무원의 이권이 한없이 생긴다.”

저자는 저작권 개념이 희박한 중국 문화에 대해 “중국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건물을) 베끼고는 ‘축하합니다. 이제 당신도 인정을 받았군요’라고 말한다”고 꼬집은 뒤 “말도 안 되는 명령에도 냉정하게 대응할 수 있는 사람만이 (중국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썼다.

북미나 유럽에 워낙 신축 수요가 없다 보니 스타키텍트들에게 한국은 “앞으로 가장 주목해야 하는 나라”가 됐다. “한국 클라이언트의 자신감과 높은 뜻을 보고 있으면 ‘아 나는 일본이란 촌에 사는 놈이구나’ 하는 씁쓸한 기분이 든다”는 것이다.

일본은 건축계의 노벨상인 프리츠커상 수상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나라다. 그런데도 구마 교수는 일본의 경우 위험을 회피하는 ‘샐러리맨 문화’ 때문에 역사에 남을 건축이 나오지 않는다고 진단했다. 공교롭게도 올해의 프리츠커상을 받은 반 시게루도 최근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샐러리맨 경영자가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한다”며 비슷한 말을 했었다.

2002년 중국 베이징 교외에 지은 대나무집. 아사카와 사토시 제공
2002년 중국 베이징 교외에 지은 대나무집. 아사카와 사토시 제공
구마 교수는 반 시게루와 함께 일본의 4세대 건축가 그룹의 대표 주자다. 좋은 건축물 못지않게 ‘연결하는 건축’ ‘자연스러운 건축’ 같은 좋은 책을 지었다. 그는 1755년 포르투갈 리스본 대지진 이후 콘크리트와 철로 짓는 모더니즘 건축이 시작됐듯,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이후엔 새로운 건축 패러다임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한다. 콘크리트로 짓는 ‘강한 건축’보다는 나무를 이용해 세월이 가면 낡아 수리해야 하는 ‘죽는 건축’ ‘약한 건축’을 하자는 제안이다. “낡지 않는 건 괴물밖에 없다…불사(不死)라는 픽션을 죽음이라는 리얼리티로 전환해야 한다.”

1991년 데뷔작 ‘M2’가 혹평 받은 후 물먹고 지방 도시를 전전하던 시절부터 시작해 그의 건축 철학을 만들어온 작업들을 정리하는 데 자서전의 많은 부분을 할애했다. 전작들과 비교하면 무게감이 떨어지지 않으면서도 책장이 훌훌 넘어간다. 강추!

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나#건축가 구마 겐고#건축#스타키텍트#저작권#죽는 건축#약한 건축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