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건축과 조명과 요리가 通通通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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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두 건축가-김주영 조명디자이너 부부가 오감예술로 사는 법

건축가 안경두 씨(왼쪽)와 조명 디자이너 김주영 씨는 남편과 아내, 같은 건축사무소에서 일하는 건축가와 조명 디자이너, 레스토랑의 공동 운영자라는 3가지 관계를 가지고 있다. 16일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갤러리아백화점 내 ‘테이스팅룸’ 4호점에서 만난 부부는 자신들이 직접 만든 조형물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건축가 안경두 씨(왼쪽)와 조명 디자이너 김주영 씨는 남편과 아내, 같은 건축사무소에서 일하는 건축가와 조명 디자이너, 레스토랑의 공동 운영자라는 3가지 관계를 가지고 있다. 16일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갤러리아백화점 내 ‘테이스팅룸’ 4호점에서 만난 부부는 자신들이 직접 만든 조형물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단언컨대 이 두 사람의 이야기는 누군가에겐 시기심과 질투심을 줄 수 있을지 모른다. 각박한 세상 속에서 일과 사랑을 모두 잘 ‘요리’해 나가는 부부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두 남녀를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남자: 안경두(44). 미국 예일대, 하버드대에서 건축을 전공한 후 2004년 ‘비안디자인’ 건축사무소를 설립. 현재 건축설계사와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활동 중. 서울 마포구 상암동 CJ E&M 센터와 SBS 신사옥, 홍익대 인근의 YG 사옥, 강남구 청담동 씨네시티 멀티플렉스 등의 실내 디자인을 맡았음.

◇여자: 김주영(38). 미국 파슨스 디자인스쿨에서 조명 디자인을 전공. 조명 디자이너로 활동하다 안 씨와 결혼해 함께 ‘비안디자인’을 이끌고 있음. 안 씨가 만든 공간에는 늘 김 씨의 조명 작품이 전시됨.

토마토 스튜에 미트볼과 달걀 노른자를 넣은 스튜요리.
토마토 스튜에 미트볼과 달걀 노른자를 넣은 스튜요리.
“건축가와 조명 디자이너가 만나 일을 같이 하는구나”로 끝날 수 있었던 이들의 인생에 또 다른 이야기가 펼쳐졌다. 그 주제는 ‘요리’다. 5년 전 서울 청담동에 차린 가정식 레스토랑 ‘테이스팅 룸’은 총 4개 매장(청담동, 방배동 서래마을, 이태원동, 압구정동 갤러리아백화점)으로 늘어났다. 일을 하면서 사랑도 나눈다는 모습은 마치 노래를 만들다 사랑에 빠지는 영화 ‘그 여자 작사 그 남자 작곡’의 휴 그랜트와 드루 배리모어를 연상케 한다. 한 가지 다른 점은 영화 속 남녀는 일과 사랑으로 끝났지만 안 씨와 김 씨는 여기에 요리라는 취미까지 더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요리를 설계하는 걸까, 디자인하는 걸까. 건축과 디자인, 그리고 요리에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 걸까. 16일 오후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갤러리아백화점 내 테이스팅 룸 4호점에서 만난 부부는 “세 가지 모두 오감(五感)으로 느끼는 예술”이라고 말했다. “요리를 예술로 만들어 사람들을 감동시키겠다”는 두 사람의 ‘창조 음식론(論)’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됐다.

▼ ‘창조음식’은 50개 실험하다 40개 버리면서 건지는 ‘작품’ ▼
Scene#1… 건축가의 요리, 조명 디자이너의 와인

건축 설계와 조명 디자인 일을 하면서도 부부는 요리라는 공통 관심사를 갖고 대화를 나눠왔다. 관심사를 취미로만 놔둘 수 없어 이들은 직접 개발한 음식을 기반으로 5년 전 레스토랑 사업을 시작했다.
건축 설계와 조명 디자인 일을 하면서도 부부는 요리라는 공통 관심사를 갖고 대화를 나눠왔다. 관심사를 취미로만 놔둘 수 없어 이들은 직접 개발한 음식을 기반으로 5년 전 레스토랑 사업을 시작했다.
두 사람은 2001년 미국 뉴욕에서 처음 만났다. 당시 미국에서 건축가로 활동하던 안 씨는 레스토랑 설계 의뢰를 받으며 자연스럽게 요리에 관심을 갖게 됐다. 바쁜 와중에도 요리 야간반 수업을 들었고 한국의 한 잡지에 ‘뉴욕 맛집’을 소개하는 칼럼니스트로 활동했다. 그러던 중 뉴욕 내 한국인 모임에서 만난 김 씨와 함께 맛집 탐방을 하게 됐다. 당시 김 씨는 뉴욕에서 조명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안 씨는 처음에 김 씨에게 음식을 맛있게 먹는 ‘엑스트라’ 역할을 부탁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음식 얘기가 취향 얘기, 인생 얘기로 번져 나갔다. 건축가는 어느새 조명 디자이너를 인생의 ‘주인공’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이야기 소재는 대부분 음식이었다. 어느 날 안 씨와 김 씨는 함께 TV를 보던 중 소스를 시험관에 넣어 음식에 뿌리는 특이한 요리사가 있는 시카고의 한 레스토랑을 보게 됐다. 두 사람은 바로 휴가를 내고 4박 5일 일정으로 시카고로 향했다. 돌아오는 길에 안 씨는 “훗날 우리가 함께 레스토랑을 차리면 시카고의 그 레스토랑처럼 특이하게 공간을 꾸며 보자”고 김 씨에게 얘기했다. 와인에 관심이 많던 김 씨는 이후 와인 소믈리에 자격증을 땄다. 안 씨가 만든 요리에 어울리는 와인을 짝지어 주고 싶어서였다.

요리와 와인의 최적 조합을 찾던 이들은 2003년, 만난 지 2년 만에 서로에게 최적의 짝이 됐다. 이듬해 귀국해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 건축 사무소 ‘비안디자인’을 냈다. 5년 동안 본업에 충실하던 이들은 2009년 드디어 회사 1층의 비어 있던 공간을 개조해 레스토랑을 냈다. 가게 이름은 테이스팅룸으로 지었다. 해외 유명 와인 공장에서 방문객들이 와인과 음식을 즐기는 공간을 뜻한다. 부부의 테이스팅룸은 건축가 남편이 개발한 요리, 조명 디자이너 아내가 고른 와인을 함께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Scene#2… 요리도 공간을 디자인하듯

부부가 직접 디자인한 레스토랑의 천장 조명.
부부가 직접 디자인한 레스토랑의 천장 조명.
안 씨와 김 씨는 이탈리아 음식과 미국 남부 뉴올리언스 음식을 한국식으로 재해석한 메뉴들을 만들었다. 지금 테이스팅룸은 온라인 블로거들 사이에서 맛집으로 꼽힌다. 좋아서 시작한 취미는 5년이 지나니 본업 외의 또 다른 ‘일’이 됐다. 두 사람뿐이던 레스토랑에서는 현재 수십 명의 요리사가 음식을 만들고 있다.

블로거들의 공통된 의견 중 하나는 “그곳에 가면 신기한 메뉴가 많다”는 것이다. 대표 메뉴인 ‘돼지고기 삼겹살 파스타’는 너구리 라면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것이다. 라면처럼 꼬불꼬불한 푸실리 룽기(나선형의 파스타 가닥)를 삼겹살과 버무려 만든 퓨전 음식이다. 이 외에도 라사냐를 수제비처럼 뜯어서 소스에 버무린 ‘수제비 범벅’과 해산물이나 닭고기 대신 프라이팬에 구운 곱창을 넣어 만든 볶음밥 ‘곱창 잠발라야’, 베이컨과 시금치를 올려 만든 ‘시금치 플랫 브레드’ 등 실험적인 메뉴가 상당수다. 맛에서도 단순한 짠맛이나 매운맛 등 2차원적인 접근보다는 쫄깃함이나 바삭함 같은 입체적인 느낌이 주로 나타났다.

“‘예쁜 것이 아닌 특이한 공간을 만들자’는 우리 건축 사무소 구호처럼 음식도 특이한 메뉴로 승부를 보고 싶었어요. 맛있는 음식은 어딜 가도 있으니까요. 다른 레스토랑에서 할 수 없는 특별한 경험을 사람들에게 주자는 취지로 메뉴를 개발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건축, 디자인과 요리의 접점이고요.”(안 씨)

“우리 음식을 먹으며 즐거워하는 사람들 모습을 보면 참 기쁘더라고요. 내가 디자인한 공간을 의뢰인이 보고 고맙다고 할 때 느끼는 감정과 비슷한 거죠.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이끌어 낸다는 점에서 요리도 예술이라 생각합니다.”(김 씨)

요리를 창작 예술로 보는 이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이디어다. 그들은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어디서 얻을까. 여행이나 사색 등의 흔한 대답 대신 ‘밥상머리’라는 답이 나왔다. 아이디어 탐색은 집에서 먹든, 외식을 하든 식탁에 올라온 음식을 부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이 음식에 다른 소스를 뿌려 보자” “튀기지 말고 데쳐 보자” 등 메뉴를 분해하고 해체하면서 새로운 것을 얻는 방식이다.

Scene#3… 창조 음식? 50개 만들면 40개는 버려야 얻을 수 있는 것

사과에 절인 고기를 넣은 오믈렛(왼쪽), 그리고 크리스피 베이컨과 옥수수 팬케이크.
사과에 절인 고기를 넣은 오믈렛(왼쪽), 그리고 크리스피 베이컨과 옥수수 팬케이크.
내놓는 아이디어가 모두 기발한 메뉴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안 씨는 “메뉴 50개를 만들면 그중 살아남는 것은 10개가 될까 말까 할 정도로 실패를 많이 한다”고 말했다. 특이함을 추구하다 보니 맛으로 감동을 주기가 쉽지 않다. 김 씨는 “메뉴 개발하는 데 이틀이 걸린다면 식당 내 요리사들을 설득하는 데 열흘이 걸릴 정도”라고 말했다.

그래도 그냥 흔한 곱창전골을 만들 수는 없다. 곱창 잠발라야를 내놔야 직성이 풀린다. 계속 ‘창조 음식’에 도전하는 이유를 묻자 안 씨는 “숨길 수 없는 예술가의 ‘곤조’ 때문이 아니겠느냐”며 웃었다. 남편의 얘기에 아내 김 씨는 “요리를 예술 작품이라 생각하는 우리에겐 ‘당신들 음식이 제일 특이하다’라는 말이 곧 칭찬”이라고 했다.

창조 음식 만들기에 몰두하다 보니 본업을 대하는 태도도 바뀌었다. 안 씨는 “그전에는 공간을 디자인할 때 치장을 최소화하는 ‘미니멀리즘’을 추구했다면 외식업에 뛰어든 뒤에는 좀 더 대중적인 감각이나 사람들이 원하는 스타일에 귀를 기울이게 됐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실험적인 요리를 선보이는 테이스팅룸 외에 다른 스타일의 레스토랑도 내고 이를 브랜드화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남편과 아내로, 건축가와 조명 디자이너로, 레스토랑 공동 운영자로… 부부는 하루 종일 붙어 있지만 다투는 일이 거의 없다. “감성적인 나에게 이성적인 아내가 없었다면 일이고 요리고 다 망했을 것”이라는 안 씨의 얘기에 김 씨는 “남편이 가진 장점을 믿으니 많은 것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어느덧 서로에 대한 배려를 함께 ‘요리’하고 있었다.

글=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
사진=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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