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란 바이클로 아카데미 원장(43)은 “자전거 복장이 평상복보다 더 잘 어울린다고 시누이가 제사 때도 운동복을 입으라고 하더라”며 웃음지었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1997년 가을 울산 남구 달동의 한 골목길. 스물여덟 살 주부 이미란은 자전거 핸들을 꽉 쥐었다. 동네 초등학교 운동장을 3바퀴 돈 후 나선 ‘도로 주행’ 실습. 초등학교 이후 처음 타 본 자전거였지만 괜한 걱정을 한 것 같았다. 2차선 도로는 다행히 한적했다. 한 발 두 발 페달을 밟아나갔다. “야호! 되네!” 환호는 잠시 후 비명으로 바뀌었다. 갑자기 전봇대가 그녀에게 돌진해온 것이다. 대낮의 하늘에 별이 떴다. 당시 누구도 알지 못했다. 불과 2년여 뒤 그녀가 산악자전거 국가대표가 될 줄은 말이다.
○ 연습 2년 반만에 자전거 국가대표
자전거를 타기 얼마 전. 500만 원이나 들여 병원에서 이런저런 검사를 받았지만 의사들은 “원인을 알 수 없다”며 고개만 저었다. 이미란 본인은 출산 후 몸 여기저기가 아파 견딜 수 없었다. 체중이 86kg까지 늘어난 후에는 아예 저울 위에 올라가지도 않았다. 우울증이 생겨 친구도, 친지도 만나기 싫었다.
마지막으로 들러 본 한의원. 원장이 맥을 짚더니 “90세 할머니의 맥이다”라고 했다. 약을 좀 지어 먹으라고 했다. 이미란에겐 ‘얼마나 돈을 받으려고 저러는 걸까’란 생각이 먼저 들었다. 뜻밖에도 한의사는 보약 한 재와 운동요법을 권했다. 추천 종목은 수영과 자전거. 수영은 모유수유에 방해가 될 것 같았다. 그렇게 이미란과 자전거의 만남이 시작됐다.
고등학교 때 카누 선수를 하고 체대까지 나온 그녀였지만 자전거 타기는 만만치 않았다. 출산과 육아로 체력과 근력은 일반인 수준으로 떨어져 있었고, 주로 상체를 쓰는 카누와 하체 중심인 자전거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계속해서 자빠지기만 하는 자신이 부끄러워 이미란은 산으로 갔다. 울산대공원 뒤편에 있는, 개발이 전혀 안 된 야산. 처음엔 일반 자전거로, 나중엔 20만 원대 철티비(철로 만든 저가 산악자전거·MTB)로 산길을 달렸다. 연습을 할수록 실력이 나아졌으나 난관도 있었다. “한 번은 앰뷸런스를 부를 수 있다면 부르고 싶은 상태가 됐어요. 그런데 숨을 쉬어보니 쉬어지더라고요. 죽진 않겠구나 싶었죠. 절뚝거리며 자전거를 끌고 내려왔어요.” 자신이 붙은 후 부산 울산 경남의 고수들을 찾아다니며 ‘한 수 지도’를 부탁했다. 스폰서가 없어 버스 짐칸에 자전거를 싣고 전국 각지의 대회에 참가했다. 국가대표가 되기 위한 포인트를 따기 위해서였다.
2000년, 기적에 가까운 일이 일어났다. 자전거를 시작한 지 2년 반만에, 그것도 거의 독학으로 자전거를 익힌 이미란이 가슴에 태극마크를 단 것이다. 감독을 빼고는 그가 팀 내에서 제일 나이가 많았다. 우울증과 전신통증은 이미 한참 전에 사라지고 없었다. ○ 갑자기 멈춰 선 아시아경기 레이스
2002년 10월 10일, 부산 기장군 아시아경기대회 산악자전거 경기장. 급경사를 내려오던 한국 대표 이미란이 갑자기 멈춰 섰다. 아직도 왜 그랬는지 모른다. 평소 같으면 그냥 지나쳤을 평범한 곳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전력 질주해 코스 후반부를 누구보다 빠르게 통과했지만 결과는 전체 7위. 24일 한강에서 기자와 만난 그녀는 최종 순위를 기억하지 못했다. 그만큼 충격이 컸던 탓이었다.
“너무 서럽고 분하고 원통했어요. 그 후 한 달 동안 눈만 뜨면 운동을 하러 갔어요. 정말 어렵게 국가대표가 됐는데…. 결국은 운명이라고 생각하기로 했어요. 그렇지 않으면 밤에 잠도 못 잘 테니까.”
그녀는 1년 정도 후에 선수 생활을 그만뒀다. 체력 문제가 ‘아지메(아줌마) 선수’에겐 큰 부담이었다. 2003년 상주에서 열린 전국대회 2위가 마지막이었다.
선수 생활을 마쳤지만 그녀는 더 뜨거운 열정에 불타고 있었다. 자전거로 할 수 있는 더 큰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제가 자전거를 시작할 무렵이 박세리 선수가 떴던 때였어요. 마침 ‘체대에선 왜 이렇게 좋은 운동을 가르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죠. 내가 박세리처럼 되어 이렇게 좋은 자전거 타기를 보급하리라고 결심했어요.”
은퇴 이후 그녀는 자전거 타기 운동을 벌이는 시민단체를 만들어 사무국장으로 일했다. “내가 박세리가 되는 것보다는 더디겠지만 천천히 교육을 해 보자고 다짐했었죠.” 개인 사정으로 서울로 이사한 후인 2010년에는 LS그룹의 자전거 유통체인 바이클로에 스카우트됐다. 그리고 회사에 제안해 올해 9월 사회공헌을 위한 비영리 교육법인인 ‘바이클로 아카데미’를 설립했다. 바이클로 아카데미는 일반 동호인을 대상으로는 자전거 안전 주행과 기초 정비를, 창업희망자를 위해서는 전문 정비와 경영 교육을 한다.
○ 자전거로 신세계를 찾으세요
“앞브레이크만 잡으면 이렇게 됩니다.” 이미란 원장이 24일 한강시민공원 반포지구에서 자전거 브레이크에 대해 직접 설명해줬다. 앞브레이크는 정지, 뒷브레이크는 감속 기능을 한다. 급정거를 하려면 양쪽 브레이크를 동시에 잡아줘야 한다.기자는 11일과 24일 두 차례 이 원장을 만났다. 그녀는 아주 열정적이었다. 특히 자전거 얘기가 나오면 그야말로 불이 붙는 듯했다. 이 원장의 자전거 안전 교육을 받은 한 수강생은 블로그에 “선생님의 열띤 강의에 (다른 수강생들의) 숨소리조차 들을 수 없었습니다”라고 썼다. 이 원장은 정장을 입었을 때는 모델을 떠올리게 하는 호리호리한 몸매였지만 자전거를 탔을 때는 야생마같이 단단한 근육을 자랑했다.
‘자전거가 왜 좋으냐’고 물으니 폭포수 같은 예찬론이 쏟아졌다. 일부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자전거를 타면 근력과 심폐 기능이 좋아집니다. 정신건강에도 무척 유익하지요. 자전거는 전신운동이면서 특히 몸을 지탱하는 하체를 튼튼하게 해줍니다. 오르막과 내리막, 코너링을 할 때 쓰는 근육이 다 달라요. 야외에서 경치를 즐기면서 탈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입니다. 헬스나 수영 같은 운동도 좋기는 하지만 한정된 공간에서 해야 하잖아요. 자전거를 타면 자연의 공기를 마실 수 있고, 계속 경치가 바뀌어 지루하지가 않지요. 자전거를 타면 내내 좋다, 감사하다란 생각만 납니다. 대기업 간부 한 분이 ‘자전거를 탄 후 신세계를 발견했다’고 하더군요. 차를 타거나 그냥 걸어 다닐 때보다 확실히 세상이 다르게 보입니다.”
‘원장님 같은 분이 중년층의 희망 아니냐’고 하자 그들을 위한 조언을 해줬다.
“대학 졸업 후 부산에서 헬스트레이너 생활을 한 적이 있어요. 꽤 돈 많은 분들이 회원이었는데, 남자분들은 하나같이 배가 나오고 여자분들은 얼굴이 어둡더군요. 왜 그렇게 사는지 이해가 안 됐어요. 그런데 제가 아이를 낳고 몸이 변하니 알겠더군요. ‘아, 그분들이 본인 몸을 건사할 여유가 없구나. 직장생활에, 아이들 뒤치다꺼리에 진이 빠지겠구나.’ 출산 우울증으로 실의에 빠진 저를 건져준 것이 바로 자전거였어요. 중년 독자 여러분께서도 포기하지 말고, 조금만 시간을 내 자기를 다잡고 다시 시작해 보세요. 그때 가장 좋은 도구 중 하나가 자전거랍니다. 더군다나 우울증이 있는 분들은 빠른 시일 안에 너무나 좋은 방향으로 변화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기자가 ‘인생 후반을 자전거 교육으로…’ 운운하자 이 원장이 말을 고쳐줬다. “후반이 아니라 중반으로 해주세요.” 그녀는 인생 후반에 자전거로 노인이나 장애인을 도울 계획을 세우고 있단다. 그녀의 두 바퀴는 앞으로도 계속 힘차게 돌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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