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성호의 옛집 읽기]<10>‘한국건축의 메카’ 양동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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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2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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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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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집들을 공부하면서 ‘어쩌다가 우리는 한집에서 대충 20년도 살지 못하게 됐는가’ 하고 스스로 물을 때가 있다. 집은 고사하고 마을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해 재개발이니, 뉴타운이니, 요사스러운 명칭에 휘둘려 기껏 살아 온 터전을 뒤엎어 버리는 게 우리의 지금 형편이다. 코흘리개였던 동네 꼬마가 어느덧 자라 바래다 준 남자친구와 대문 앞에서 헤어지는 모습에 놀라듯 세월을 느꼈다던 이야기는 이미 과거가 되어버렸다. 우리는 그럴 틈도 없이 가격이 오를 때 팔고, 이문이 생길 때 부수고, 새로 짓고 하는 부동산 자본주의에 우리 삶을 통째로 맡겨 왔다.

이런 때 400년이나 된 집들이, 그것도 한 두 채도 아닌, 100여 채나 되는 집이 한 마을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동네가 있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경북 경주시 안강의 양동마을이 그곳이다. 조선시대의 반가들이 그대로 남아 있고, 거기에 아직도 후손들이 그대로 살고 있어 과거가 박제돼 있는 곳이 아니라 생활이 살아 숨쉬고 있는 곳이다.

안강에서 영천으로 가는 길에서 왼쪽으로 꺾어 들어가면 먼저 호명산과 만나 마을의 전모가 쉬 보이지 않는다. 이 호명산을 휘돌아 들어가면 설창산에서 갈라져 나온 산줄기들이 흡사 물(勿) 자 형국을 이루며 마을 안을 흐르는 양동천과 만나 멈추고, 양동천은 다시 마을 밖을 흐르는 안락천과 이어지며 동해로 빠지는 형산강 줄기와 만난다. 반가들은 물 자 형국의 획을 따라 산 능선에 자리하고, 소작농인 타성받이와 노비들의 집은 골짜기에 자리하고 있다.

양동마을은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의 두 성씨가 대대손손 세를 이루며 지내온 곳이다. 지금도 ‘장가 간다’는 말이 남아있듯이 옛날에는 지금과 달리 결혼을 하면 남자는 처가에서 살았다. 1458년 손소라는 청년이 25세의 나이로 부인을 따라 처가살이를 오면서 양동마을은 풍덕 류씨에서 월성 손씨의 마을로 변했다. 이어서 이언적의 아버지 이번이 손소의 외동딸에게 장가들면서 여강 이씨의 자손들이 퍼지기 시작했다. 이 두 성씨가 양동마을에 살게 되면서 자손들의 교육, 가문의 회합을 위한 집이 지어지고, 종가와 파(派) 종가의 집들이 지어지게 되었다. 400년 전의 조선집이 여기에 있고, 앞으로의 한국 건축도 여기에 있다.

함성호 시인·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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