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성호의 옛집 읽기]<9>‘영남 정자의 전형’ 독락당 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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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2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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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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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의 정자가 집에서 집 바깥을 향해 있다면, 영남의 정자는 집 바깥에서 집으로 귀착한다. 호남의 넓은 들과 하천은 함께 생활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연의 순행에서 변하지 않는 원리보다는 끝없이 변화하는 대상들의 존재에 더 관심을 갖게 하였을 것이다. 한편 산이 많고 골짜기가 많은 영남에서는 변화하는 대상의 원리를 파악하고 그것을 도덕적 원리로 정리해 인간과 사회를 통제하는 규범으로 삼았다. 그래서 호남 정자는 호방하고 영남 정자는 은근하다. 호남의 정자에선 시와 음악이 연주되고, 영남의 정자에선 인간의 도리와 그것을 표현하는 태도가 중시된다.

경북 경주에 있는 독락당의 계정(溪亭)은 영남 정자의 전형이다. 독락당은 회재 이언적이 김안로의 임용에 반대하다가 중종에게 내쳐져 암울한 시절을 보낸 집이다. 약관의 나이에 조한보와 무극태극 논변을 펼치며 이(理) 중심의 성리학을 확립한 그로선 생애 처음 맛보는 좌절이었을 것이다. 집 이름도 독락(獨樂)이다. 홀로 즐긴다는 뜻이다. 예부터 홀로 즐김은 같이 즐기는 것만 못하다고 했다. 그런데 이언적은 홀로 즐긴다고 당호를 짓는다. 그러고는 스스로 원해서 홀로 즐기는 건 아니라고 못 박는다. 정계에서 물러난 그의 우울한 심사가 엿보인다.

그러나 그의 쓸쓸한 마음 풍경과는 달리 계정 옆으로 흐르는 자계는 가슴 먹먹하도록 아름답다. 계정은 이 경치를 담기 위해 담에서 개울 쪽으로 튀어나와 있다. 그리고 기둥을 내려 자계천의 바위에 우뚝 솟아 있다. 그 바위의 이름이 관어대(觀魚臺)다. 이언적은 어쩔 수 없어서 혼자 즐긴 게 아니라 혼자서 충분히 즐긴 것 같다. 계정 주위의 바위에 일일이 이름을 붙였다. 관어대 건너편 바위는 ‘시를 읊으며 돌아오고 싶구나’라는 논어의 구절을 따서 영귀대(詠歸臺), 그 위의 바위는 ‘맑은 물에 갓끈을 씻는다’는 굴원의 시 구절을 따 탁영대(濯纓臺), 그 위쪽 바위는 마음을 맑게 한다는 징심대(澄心臺)로 불렀다.

계정의 영역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자계의 하류로 내려가 보자. 옥산서원 근처에 주역의 계사상전에서 이름을 따온 세심대(洗心臺)가 있다. 글씨는 퇴계 이황의 것이다. 계정의 영역은 산으로 다시 퍼져나간다. 도덕산 무학산 화개산 자옥산…. 거대하지 않은가! 그러나 얼마나 작은가.

함성호 시인·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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