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낀 세대’ 90학번, 그 먹먹했던 사랑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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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9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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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 그 녀석/한차현 지음/372쪽·1만2500원·열림원

1990년대 젊은이들의 연애를 다룬 소설 ‘사랑, 그 녀석’을 펴낸 소설가 한차현 씨. 그는 ‘쓸 게 없어서 추억 쪼가리를 팔아먹느냐’는 말이 나오면 “추억을 주물러보는 게 사람이 할 수 있는 오만 가지 짓들 가운데 가장 재미있는 것 아니냐”고 항변한다고 했다. 열림원 제공
1990년대 젊은이들의 연애를 다룬 소설 ‘사랑, 그 녀석’을 펴낸 소설가 한차현 씨. 그는 ‘쓸 게 없어서 추억 쪼가리를 팔아먹느냐’는 말이 나오면 “추억을 주물러보는 게 사람이 할 수 있는 오만 가지 짓들 가운데 가장 재미있는 것 아니냐”고 항변한다고 했다. 열림원 제공
1990년대 학번은 ‘낀 세대’다. 불같이 타오르던 1980년대의 집단적 문화에도 온전히 끼지 못하고, 2000년대 들어 급격히 불어온 개인주의 문화에도 속하지 못한 세대. ‘세시봉’을 찾으면 왠지 늙다리 같고, 아이돌 가수의 노래를 흥얼거리면 철없어 보이는 게 이들이다.

작가는 90년대 학번의 사랑과 추억을 재생하기 위해 1993년 이상은이 발표한 ‘언젠가는’을 택한다.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사랑할 땐 사랑이 보이지 않았네/하지만 이제 뒤돌아보니/우린 젊고 서로 사랑을 했구나.’

작품의 전체적인 정서는 이 노래로 함축된다. 최루탄 냄새가 가시지 않은 캠퍼스가 배경이지만 혼란했던 사회상은 소설의 배경을 설명하는 역할에 그친다. ‘그때 내 나이 스무 살이었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사랑뿐이었지’라고 서두에서 밑밥을 깐 대로 소설은 90년대 초반 학번들의 ‘사랑법’을 충실히 전달하는 데 주력한다.

‘나(차현)’는 90학번 신입생으로 대학에 들어와 3학년 여학생 선배 미림에게 빠지며 몰래 데이트를 하지만 미림은 늠름한 3학년 학군장교(ROTC)에게로 떠난다. 나는 얼굴도 성격도 그냥 그렇지만 나에게 잘해주는(혹은 나에게 만만한) 동기생 은희에게 끌려 캠퍼스 커플이 된다.

사실 스토리 라인은 평범하고 때론 진부하다. 차현이 실연의 상실감에 은희와 술에 취해 뽀뽀하고, 그러다 보니 친해지고, 섹스를 하고 싶은데 ‘은희랑 자고 싶은 건지, 그냥 여자랑 그러고 싶은 건지’ 고민하는 등의 그저 그런 연애 얘기들.

그러나 이런 평범한 연애사가 90년대 사회 문화적 배경과 맞물리면서 되살아나니 새롭다 못해 ‘낯설게’ 변화한다. 이들은 ‘있잖아요 비밀이에요’ ‘장군의 아들’ 등을 보려고 ‘4회 1관’의 스탬프가 찍힌 초록색 표를 끊어 극장에 들어선다. 길거리 리어카의 복제 테이프에서는 신해철이 ‘그런 슬픈 표정 하지 말아요∼’라며 목청을 높인다. 강의를 땡땡이 치고 훌쩍 경춘선에 올라 기차 맨 끄트머리에서 분위기를 잡는 등 90년대 연애방식이 일기장을 펼치듯 넘어간다. 지금은 모두 낯설어진 풍경이고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추억이다.

장난같이 시작한 사랑은 ‘나’가 군대에 가고 은희가 졸업을 하며 한풀 식는다. 이들은 그렇게 순수했던, 온전히 사랑만 바라봤던 순도 100%의 사랑이 인생에 다시 찾아오기 힘들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읊조린다. “사랑이란 이러한 것임을. 한때 특별했던 무엇이 어느 순간부터 그렇지 않은 것으로 보이지 않게 변해가는 과정의 일부임을.”

작가는 소설을 쓰기 위해 옛날 신문과 노래들을 들춰보며 정작 그 시절에는 미처 모르거나 무심코 스쳐 갔던 것들을 새롭게 만났다고 했다. 어느새 30, 40대가 된 90년대 학번들에게 이 작품은 20대 때의 자신을 만날 수 있는 추억의 거울이다.

황인찬 기자 hi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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