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 불륜 등 ‘막장’ 냄새를 짙게 풍기며 출발한 MBC 수목 드라마 ‘즐거운 나의집’의 여주인공 김혜수(왼쪽)와 황신혜. 사진 제공 MBC
불륜, 출생의 비밀, 살인, 성폭행, 납치….
요즘 KBS, MBC, SBS 드라마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소재들이다. 이른바 ‘막장 코드’로 분류되는 이 소재들은 온 가족이 TV 앞에 모여 있는 오후 8∼11시 드라마들에서 되풀이된다.
반면 오후 11시를 넘긴 시간에 케이블TV로 채널을 돌리면 농촌 오피스 코믹극, 메디컬 범죄수사극 등 장르의 이름부터 새로운 드라마들이 시작된다.
지상파 드라마가 낡은 흥행 공식을 따르느라 정체하는 사이 케이블 드라마는 새로운 실험을 거듭하면서 진화하고 있다.
○거액 들인 대작 보다 막장드라마가 시청률 우위
드라마의 시청률 성적 부진으로 ‘드라마 왕국’으로서 체면을 구긴 MBC는 최근 막장 드라마를 잇달아 편성했다. 수목드라마 ‘즐거운 나의 집’은 여주인공 모윤희(황신혜 분)와 남편 성은필(김갑수)이 목 조르고 술병으로 머리를 치면서 싸운 뒤 성은필이 의문사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모윤희는 상복을 벗자마자 친구의 남편(신성우)을 노골적으로 유혹한다.
‘욕망의 불꽃’에서 모녀로 나오는 신은경(왼쪽)과 서우. 사진 제공 MBC 주말드라마 ‘욕망의 불꽃’의 등장인물들도 독하고 자극적이다. 여주인공 윤나영(신은경)은 재벌가에 시집가려고 언니가 성폭행 당하도록 유도한다. 남편이 다른 여자 사이에서 얻은 아들을 자기가 낳은 것처럼 위장하려고 아들의 생모를 죽이려고도 한다. 시트콤 ‘몽땅 내사랑’도 출생의 비밀에 복수극이 펼쳐지는 막장이다.
막장의 위력 앞에 ‘모정’도 무릎을 꿇었다. SBS 주말드라마 ‘웃어요 엄마’에서 엄마(이미숙)는 짐승 같은 남자들이 술판을 벌이는 룸살롱에 배우인 딸 신달래(강민경)를 넣어주고 나온다. SBS의 대표적인 막장극 ‘아내의 유혹’의 김순옥 작가가 집필한 드라마다.
성공적인 막장 드라마로 꼽히는 ‘제빵왕 김탁구’의 주인공 윤시윤. 사진 제공 KBS 지상파 방송사가 욕먹으면서도 막장 코드에 집착하는 이유는 뭘까. 드라마 평론가인 윤석진 충남대 교수는 △지상파 3사가 드라마를 비슷한 시간대에 편성하기 때문에 경쟁이 치열한데다 △‘로드 넘버원’ 같은 실험적인 대작은 실패한 반면 막장 극 ‘제빵왕 김탁구’는 성공한 전례를 보고 안정적으로 시청률을 확보하기 위해 막장 코드에 매달리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제작비 200억 원을 들여 찍은 ‘김수로’(MBC)와 120억원을 들인 ‘로드넘버원’(MBC), 제작비 80억 원의 ‘나쁜남자’(SBS)는 시청률이 10% 안팎에 머물렀다. 청소년 시청자를 불러 모을 것으로 기대했던 ‘장난스런 키스’(MBC)가 한 자릿수 시청률로 끝난 반면 중년 여성을 겨냥한 막장극 ‘제빵왕 김탁구’(KBS)는 50%에 가까운 시청률을 기록하자 ‘막장만이 살 길’이라는 믿음이 더욱 확고해졌다는 해석이다.
익명을 요구한 외주제작사 PD는 “지상파 드라마는 시청률 15% 달성이 목표다. 미국 드라마처럼 다양한 시도를 하고 싶어도 법정 의학 스릴러 같은 장르로 가는 순간 (아줌마 시청자들이 떨어져 나가) 시청률은 10% 이하가 된다”며 “실험적인 드라마도 결국엔 연애담으로 바뀌어 법정드라마는 법정에서, 의학드라마는 병원에서 연애하는 이야기가 돼 버린다”고 털어놓았다.
○ 케이블, 규모 키운 야심작으로 진화
그동안 ‘섹시몽’, ‘메디컬 기방 영화관’ 등 선정성에 주력했던 케이블 드라마는 참신한 ‘별순검’ ‘막 돼먹은 영애 씨’의 성공 이후 실험극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신의 퀴즈’(OCN)는 ‘국내 최초의 메디컬 범죄 수사극’을 표방했다. ‘하이킥’ 신화의 김병욱 PD가 기획에 참여한 ‘원스 어폰어 타임 인 생초리’(tvN)는 농촌에 있는 증권회사 사무실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코믹 드라마다. ‘야차’(OCN)는 조선 중기를 배경으로 검투 노예까지 나오는 액션 사극이다.
오디션 프로그램 ‘슈퍼스타K’의 성공 이후 제작비 규모도 크게 늘었다. 20부작 ‘생초리’는 총제작비가 36억 원이고, ‘야차’는 12부작에 30억 원이다. ‘막 돼먹은 영애 씨’ 시즌 1의 회당 제작비 3500만 원과 비교하면 엄청난 규모인 데다 지상파 드라마의 회당 평균 제작비(1억5000만∼2억 원)에도 그리 뒤지지 않는다.
지상파에서 케이블로 인력 이동도 시작됐다. 무명의 배우들만 나온다고 해서 ‘케이블 전문배우’라는 말까지 있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신의 퀴즈’의 주인공은 충무로 간판배우 류덕환이다. ‘생초리’에는 ‘동이’ ‘로드넘버원’ ‘산부인과’ 등 지상파에서 활약했던 김동윤 남보라 이영은이 나온다.
케이블 방송사들은 참신한 소재의 실험적인 드라마를 잇달아 선보이고 있다. 왼쪽부터 OCN ‘신의 퀴즈’, tvN ‘원스 어폰어 타임 인 생초리’, OCN ‘야차’ 홍보 사진.
‘야차’는 ‘다모’(MBC)의 정형수 작가와 영화 ‘역도산’의 구동회 작가가 공동집필하며, ‘추노’(KBS) 무술팀과 영화 ‘방자전’의 의상 감독이 합류했다. ‘하이킥’ 제작팀이 후속작을 케이블에 선보인 것도 인력 이동을 실감케 한다.
이에 따라 지상파 드라마는 이미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고 케이블TV에 미래가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일본의 경우도 ‘하늘을 나는 타이어’(와우와우) 같은 수작들은 지상파가 아닌 위성 채널에서 많이 나온다는 것이다.
이문원 문화평론가는 “지상파 드라마의 최대 목표는 9시 뉴스를 보는 시청자들을 계속 잡아두는 것이다. 결국 드라마의 혁신자는 케이블TV가 될 가능성이 크다”며 “케이블과 위성방송 시청 가구가 1500만 가구가 넘는 우리는 일본보다 (비지상파 채널이 선전할 수 있는) 환경이 나은 셈”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드라마 권력이 케이블 쪽으로 이동하기에는 현실적인 제약이 크다는 반론도 있다. 드라마는 스타 의존도가 높은 편인데 톱스타들은 여전히 케이블 출연을 꺼린다. 지상파 편성을 노리던 ‘위기일발 풍년빌라’가 tvN에 자리 잡자 주연 배우인 신하균과 이보영이 제작보고회에 불참한 것도 이 같은 경향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김병욱 PD는 “‘슈퍼스타K’는 잘 됐지만 (케이블에서) 드라마로는 킬러 콘텐츠가 나오기 어렵다. 톱스타 캐스팅부터가 어려워 지금으로선 지상파와 케이블TV가 대등한 싸움을 할 수는 없다”며 “다만 종합편성 채널이 생겨 지상파에 인접한 낮은 채널을 배정 받는다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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