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억압… 폭력… 그 비극에 詩의 옷을 입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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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4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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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지대/헤르타 뮐러 지음/김인순 옮김 ·268쪽/1만500원·문학동네
◇ 숨그네/헤르타 뮐러 지음/박경희 옮김·352쪽/1만2000원·문학동네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는 죽음에 가까운 공포와 불안 속에 살고 있는 수용소 사람들의 참상을 신비로운 언어로 그려낸다. 어둡고
 캄캄한 고통 속에서도 이들의 삶은 계속된다. 영국 빅토리아 시대 화가 조지 프레더릭 워츠의 ‘희망(Hope)’. 사진제공 문학동네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는 죽음에 가까운 공포와 불안 속에 살고 있는 수용소 사람들의 참상을 신비로운 언어로 그려낸다. 어둡고 캄캄한 고통 속에서도 이들의 삶은 계속된다. 영국 빅토리아 시대 화가 조지 프레더릭 워츠의 ‘희망(Hope)’. 사진제공 문학동네
지난해 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기 전까지 루마니아 출신 독일 소설가 헤르타 뮐러(사진)는 국내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작가였다. 노벨 문학상 수상 이후 집중됐던 관심에도 불구하고 번역된 책이 없었기 때문에 독자들이 이 작가의 문학세계를 알 수 있는 방법은 간접적일 수밖에 없었다. 뮐러의 작품은 폭압적인 정치체제에 대한 비판과 관습·전통에 지배당한 마을의 고단한 삶 등을 시적인 언어와 상징, 은유로 형상화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런 특징을 잘 확인할 수 있는 대표작 두 권이 최근 출간됐다.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번역된 뮐러의 책들이다.

단편소설집 ‘저지대’는 그가 1982년 출간했던 데뷔작이다. 사회주의 독재체제였던 당시 루마니아에서 이 책의 일부는 검열 때문에 삭제된 채 출간됐다. 독일계 루마니아 소수민족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란 작가는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독재정권의 감시와 압박이 심해지자 독일로 망명했다. 이 책에는 작가의 자전적인 경험, 유년시절의 기억이 반영돼 있다.

이 작품집은 표제작인 ‘저지대’를 비롯해 19편의 짧은 이야기로 엮여 있다. 주로 독일계 소수민족이 사는 루마니아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가난과 노동, 관습 등에 짓눌린 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을 유려한 언어와 상징적인 이미지로 묘사한다. 마녀의 촛불처럼 갈대숲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허공을 쪼아대는 까마귀들, 언제나 같은 노래를 부르는 새들과 이따금 스산하게 아름다워지는 마을.

가슴 서늘할 만큼 서정적인 언어로 묘사되는 공동체는 신비스럽고 몽환적이면서도 동시에 어둡고 음습하다. 그곳은 아카시아꽃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피고 먹물 같은 야생포도 알이 익어가는 곳인 동시에 잔혹하게 도살되는 동물의 피가 흥건하고 고된 노동에 웃음과 노래마저 끊겨버린 곳이기도 하다. 작가는 유년시절 눈으로 보았던 그 세계에 대한 향수와 막연한 불안을 한 편의 시, 한 편의 꿈 이야기처럼 환상적으로 구현해 보인다.

작년 노벨문학상 헤르타 뮐러
데뷔작-최신작 국내 첫 소개
독재치하 암울한 일상…
수용소 처절한 생존본능…
유려하고 함축된 언어로 그려


수록작 가운데 ‘의견’ ‘잉게’ ‘불치만 씨’ 등은 출간 당시 당국의 검열 때문에 삭제돼야 했던 작품들. 두세 장밖에 되지 않는 짤막한 분량의 작품들이지만 언론의 자유를 탄압하는 군사정권에 대한 반감과 체제 비판적인 목소리를 직설적으로 담았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그로테스크한 언어와 이미지들은 의견과 사생활 자체를 말살하고 탄압하는 독재정권의 기만과 폭력을 우회적으로 폭로한다.

‘잉게’는 모든 사람이 “오른발 왼발 오른발 왼발”이라고 말하고 다닐 만큼 군사주의문화가 만연한 도시를 배경으로 한다. 거리는 군인과 경찰이 가득하고 사람들에 대한 은밀한 감시는 사적인 공간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그는 또 ‘의견’에서 독재정권하의 파시즘과 부조리를 이렇게 폭로한다.

“잘못된 의견은 아예 의견이 없는 것보다 훨씬 나쁘며, 결코 그 어떤 의견과도 비교할 수 없다고 했다. 의견이 아예 없는 것도 하나의 의견이고, 심지어 많은 사람의 의견이며, 올바른 의견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작가로서 뮐러를 형성시킨 체험과 문제의식, 언어 등을 가늠해볼 수 있는 작품집이 ‘저지대’라면, ‘숨그네’는 세계적 작가의 반열에 올라선 뮐러가 강제수용소란 공간을 배경으로 역사의 질곡에서 비인간화된 삶의 현장을 포착해낸 최근작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루마니아에 살던 독일계 소수민족은 히틀러의 동족인 독일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강제수용소에 끌려가게 된다.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던 민간인들, 청소년들도 무작위로 차출됐다. 그들은 폐허가 된 옛 소련 땅을 재건하기 위해 강제노역을 당하며 배고픔이란 기본적인 욕구만 남은 처참한 상태에서 수년간 밤낮 없이 착취당한다.

배급된 양배추수프와 빵을 한 숟가락, 한 점이라도 아껴먹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 그 구차하고 지독한 굶주림, 외부와 단절된 공간에서 느끼는 공포와 불안 등을 함축적이고 밀도 높은 언어로 핍진하게 그려냈다. 시대의 과오와 역사의 부조리 속에 희생된 이들의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증언하는 뮐러의 작품들은 이 시대 문학의 직능을 다시금 고민하게 한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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