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화성 전문기자의&joy]K2와 함께하는 알파인 등반 체험<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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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1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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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벽은 차고도 따뜻했네, 함께 살자던 그의 알몸처럼…

“왜 외국인들은 히말라야에 오른다고 생각하는가? 내가 셰르파들에게 이 질문을 하면 그들은 모두 어이없어하며 웃는다. 정작 그들도 그것이 궁금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질문을 외국인인 내가 그들에게 물어보다니…. 그들은 돈을 벌기 위해 외국인등반대의 짐을 운반해주며 산다. 그런데 (그들이 보기에) 뭐 하나 부러울 것도 없고, 부자로 잘만 살고 있는 외국인들이 왜 목숨까지 걸어가며 히말라야에 오르는가? 그들은 다시 내게 물었다. 돈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왜 히말라야에 오르는가?”

<조너선 닐의 ‘셰르파, 히말라야의 전설’에서>

왜 산에 오르는가? 1923년 영국의 산악인 조지 맬러리(1886∼1924)는 “산이 거기에 있기 때문(Because it is there)”이라고 말했다. 과연 그럴까? 당시 맬러리는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에베레스트 등반경험’을 강연했다. 강연료를 모아 다시 에베레스트에 도전하기 위해서였다. 그때까지 맬러리보다 높이 올라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가는 곳마다 똑같은 질문에 시달렸다. “왜 산에 오르는가? 왜 목숨을 걸고 에베레스트에 오르려 하는가?” 맬러리는 그 때마다 “에베레스트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이고, 아무도 그 정상을 밟지 못했다. 에베레스트의 존재는 도전 자체이다. 그 해답은 본능적이고, 내가 생각하기로는, 우주를 정복하고자 하는 인간 욕망의 하나이다.”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 질문은 가는 곳마다 끝이 없었다. 결국 그는 어느 강연에선가 폭발해버렸다. 어느 기자가 또 “왜 산에 오르는가?”라고 묻자 “…is there”라고 쏘아붙인 뒤 총총히 강연장을 빠져나갔다.

1970년 6월 27일 오전 3시. 스물여섯의 라인홀트 메스너(1944∼)는 낭가파르바트 남쪽 루팔벽 루트 마지막 텐트(해발 7350m)를 출발해 14시간 만인 오후 5시에 꼭대기에 닿았다. 떠날 땐 라인홀트 혼자였지만 정상에 섰을 때는 그의 한 살 아래 동생 귄터 메스너와 함께였다. 동생 귄터가 형이 캠프를 빠져 나가자 곧바로 그의 뒤를 쫓았던 것. 하지만 그들에겐 내려갈 때 생명줄인 로프도, 단 한줌의 먹을 것도 없었다. 더구나 눈 녹일 가스스토브도 없어 목을 축일 수조차 없었다. 그날 밤 그들은 정상 바로 밑에서 덜덜 떨며 얇은 비상담요 한 장으로 밤을 새웠다.

다음 날 메스너 형제는 비교적 로프 없이 내려가기가 편하다고 생각되는 서쪽의 디아미르벽(3500m)을 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루트도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극도의 추위와 허기로 몸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비몽사몽 앞서가던 형 라인홀트가 동생이 뒤따라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 것은 한참 후였다. 1시간, 2시간…. 아무리 기다려도 동생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라인홀트는 울부짖었다. 살아남은 라인홀트는 동상으로 썩은 엄지발가락 하나와 나머지 발가락 일부를 잘라냈다.

2005년 7월 14일 오전 2시. 이성원 대장이 이끄는 ‘한국 루팔벽 원정대’의 김창호 이현조 대원은 캠프4(7600m)를 출발한 지 25시간 만인 15일 오전 3시에 낭가파르바트 정상에 오르는 데 성공했다. 메스너 형제가 루팔벽 루트로 오른 이후 35년 만에 이룬 개가였다. 그동안 12개의 세계적인 등반 팀이 실패했고, 국내 팀도 두 차례나 쓴맛을 봤다.

2009년 7월 13일 오전 11시 50분, 아웃도어업체 K2익스트림팀 김형일 대장, 민준영 김팔봉 대원은 파키스탄 서부 스팬틱 골든버그(7027m) 봉우리를 서북벽 신루트로 처음 올랐다. 걸린 시간은 딱 7일(하산 하루). 식량(아침-비스킷 2조각·코코아 1개, 점심-파워젤, 저녁-밥 3분의 1공기)은 5일분밖에 없어서 이틀을 꼬박 굶었다. 장비는 8.1mm 더블로프 2동, 너트 1조, 하켄 20여 개, 아이스 스크루 7개, 스노바 3개, 눈삽 1개가 전부. 베이스캠프는 4500m 지점에 설치하고 그 다음부터는 비박으로 해결했다.

김형일 대장은 “벽의 길이(등반고도 2100m)가 아래서 보는 것보다 훨씬 길었다. 고정로프를 설치하지 않고 단숨에 올라야 하는데 무척 힘들었다”고 말했다. 민준영 대원은 “세 대원이 돌아가면서 선등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만큼 호흡이 잘 맞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민 대원은 곧바로 이어진 9월 직지원정대의 히말라야 히운출리(6441m) 북벽 신루트 개척에 참가했다가 실종됐다.

영국의 주부 클라이머 줄리 튤리스(1939∼1986)는 47세 때 히말라야 K2봉에 올랐다. 하지만 끝내 내려오지 못했다. “인생은 수많은 꿈들로 이뤄져 있다. 그렇지 않다면 살 만한 가치가 없다.”

폴란드의 반다 루트키에비치(1943∼1992)는 여성으로 처음 겨울에 알프스 마터호른 북벽에 올랐다. 1978년엔 에베레스트 단독 등정에 성공했고 1986년엔 여성으로서 처음 K2에 올랐다. 하지만 1992년 히말라야 8000m급 9번째 등반인 칸첸중가 8300m 부근서 실종됐다. “등반의 본질은 정상에 서려는 노력 따위가 아니다. 그것은 고통을 극복하려는 결단들의 연속일 뿐이다.”

3일 대둔산에서 열린 ‘K2와 함께하는 2차 알파인 등반체험’. 김형일 대장, 박윤정 대한산악연맹 등산강사, 대전산악구조대원들(류진선 이기열 윤일 양한모 이왕영)이 바윗길 초보자들의 체험을 도왔다.

체험자들은 3개조로 나뉘었다. A조는 난도 5.9의 구조대 리지 3피치 연속 등반. 그리고 45m 높이의 칠성봉 뒷면(80∼90도)으로 하강. B조는 칠성봉전망대에서 로프에 확보 줄을 건 뒤 돼지바위 정상까지 등반 이동(안자일렌). 돼지바위(50m, 80∼90도) 하강 뒤 곧이어 책바위(55m, 80∼90도) 하강. C조는 전망대까지 트레킹 이동 후 칠성봉후면 하강.

바람이 찼다. 바위 잡는 손마디가 조금씩 굼떴다. 처음 긴장하던 초보들도 시간이 지날수록 웃음기가 감돌았다. 아슬아슬 바윗길을 더듬어 한 땀 한 땀 건널 때마다 박수가 터졌다. 바위 등판마다 왁자했다. 환호성이 터지고 웃음꽃이 피었다. 바위에 벌렁 누워 하늘을 보는 사람도 있었다. 하늘은 푸르고 높았다. 까마귀 떼들이 빙글빙글 원을 그렸다.

바위는 햇빛이 비치는 곳은 따뜻했다. 그늘진 곳은 서늘했다. 꺼끌꺼끌한 바위 손맛이 막국수 맛처럼 소박했다. 손마디가 찢긴 줄도 몰랐다. 밧줄은 능구렁이처럼 구불구불 바위를 오르내렸다. 바위가 꺾인 곳에선 밧줄도 똬리를 틀었다. 절벽 틈새 소나무가지에선 혀를 날름거렸다.

교사 장현정 씨(28)는 “트레킹 정도로 가볍게 생각하고 갔다가 난생 처음 바위를 타봤다. 한마디로 쇼킹했다. 처음엔 엄청 떨려 도저히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리가 후들거리면서도 어찌어찌 해낸 것 같다. 비록 얼떨결에 해냈지만 내 인생의 한 포인트가 됐다. 가슴이 벅차다. 마음에 여유가 없어서 주위의 아름다운 풍경을 담아오지 못한 게 아쉽다”고 말했다.

회사원 최수철 씨(46)는 “15년이나 산에 다녔으면서도 주먹구구로 다닌 것 같다. 바위는 몇 번 타봤지만 설렁설렁 어설피 알았었다. 이번에 비로소 바위가 얼마나 아름답고 포근한지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강사님들로부터 기본자세도 확실하게 배웠다. 풀 한 포기 나뭇잎 하나하나 모두 다 소중하고 고마웠다. 늦가을 단풍이 너무 아름다워 카메라가 터지도록 담아왔다”고 말했다.

바위의 너른 등짝은 잠시 대기하고 있는 초보들의 ‘수다방’이었다. 저마다 무용담을 자랑했다. 뿌듯한 얼굴로 저 아스라한 길을 어떻게 더듬어 왔는지 설명했다. 배낭에선 자연스럽게 사탕 갱엿 초콜릿 과자 배 사과 생수 등이 나왔다. 문득 점심때가 훨씬 지난 것을 깨달았다. 갑자기 몸에 한기가 들면서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배가 고팠다. 손바닥이 얼얼했다. 바람이 “휘잉∼”하고 귓가를 스쳤다.

회사원 장현덕 씨(28)는 “바위는 두 번째 타지만 제대로 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날씨가 오전엔 적당히 추웠고, 오후엔 적당히 따뜻해 좋았다. 아침을 굶었는데 너무 긴장해서 그런지 배고픈 줄도 몰랐다. 점심은 초코바 하나로 끝냈다. 김형일 대장님의 겸손함과 진지함을 보고 인생에 대해서도 많이 배웠다. 친구들에게 바위 타는 내 사진을 보여주며 자랑을 많이 했다”며 흐뭇해했다. 회사원 강선영 씨(27)는 “멋모르고 갔다가 엉겁결에 바위를 타봤다. 대둔산에 우뚝우뚝한 큰 바위들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헬멧과 안전벨트를 지급받은 뒤, 강사님이 ‘생명줄’ 이야기를 하면서부터 은근히 겁이 나기 시작했다. 돼지바위를 하강하면서부터 주위 경치가 눈에 들어왔다. 겨우 손마디 두 개로 잡을 수 있는 바위 틈새조차 너무 감사했다. 다른 분들과도 금세 정이 들어 좋았다”고 말했다.

앞서 하강한 사람들은 뒷덜미가 뻣뻣했다. 목을 잔뜩 젖힌 채, 넋을 잃고 내려오는 사람들을 쳐다봤다. 내가 저 까마득한 절벽을 어떻게 내려왔을까. 두 번 하라고 하면 못할 것 같다. 서산에 붉은 해가 덜컹 걸렸다. 귀밑까지 발그레 물든 해. 저 해는 지금 어디로 미끄덩 하강하고 있을까. 산에 오른다는 것은 하나의 삼각형을 그리는 것과 같다. 베이스캠프로 가는 길은 삼각형의 밑변을 그리는 일이다. 꼭대기를 향해 오르는 일은 위로 솟은 두 변 중 한 변을 완성하는 것과 같다. 정상 도달은 하나의 중간단계일 뿐이다. 삼각형은 산 아래로 내려왔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
▼단독·무산소·속공등반…알파인의 도전정신▼


알파인 등반의 핵심은 초경량속공 등반이다. ‘혼자서, 더 가볍게, 더 빨리’가 화두다. 산에선 짐이 많으면 많을수록 거북이가 된다. 거추장스러운 짐들을 다 내려놔야, 훨훨 나는 새가 된다. 새는 자유정신의 상징이다. 자유인은 열정과 탐험정신이 가득한 사람이다. 알파인 등반가들이 바로 그렇다. 그들은 거추장스러운 것을 싫어한다. 산소통을 벗어던지고 ‘나 홀로 등반’을 고집한다.

일본의 우에무라 나오미(1941∼1984)는 1970년 일본인 처음으로 에베레스트에 오른 ‘일본 산악영웅’이다. 그는 세계 처음으로 5대륙 최고봉에 올랐으며, 그것도 에베레스트를 뺀 나머지 4곳은 단독 등반이었다. 그는 늘 새로운 것을 꿈꿨으며, 늘 혼자였다. 1978년 혼자서 개 썰매를 끌고 북극권 1만2000km를 종단한 후, 북극점에 세계 처음 단독 도달한 것도 바로 그 결과였다. 그는 개 썰매 다루는 것을 익히기 위해 그린란드 최북단에서 1년 동안 현지 생활을 했다. 1968년엔 아마존 강 6000km를 뗏목을 타고 혼자 내려오기도 했다. 결국 1984년 그는 북미 최고봉인 매킨리에 단독 등반에 성공한 후 내려오다 죽었다.

이탈리아 한스 카멀란더(1956∼)는 1996년 무산소 단독으로 에베레스트에 오른 후 세계 처음으로 스키활강으로 하산했다. 그는 이미 1990년 낭가파르바트에 오른 후 3500m나 되는 서쪽의 디아미르 사면(3500m)을 스키활강으로 내려왔고, 1994년엔 브로드피크(8047m)에 오른 후 7000m 지점부터 스키를 타고 내려왔다.

스위스의 에라르 로레탕(1959∼)은 1995년 세계 3번째로 14좌 완등에 성공했다. 속공등반이 특기. 보통 일주일 걸리는 에베레스트 북벽을 2박 3일 만에 셰르파 없이 무산소 야간등정으로 해치웠다. 산악인들은 “벌거벗은 등정”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프랑스의 크리스토퍼 프로피는 알프스 3대 북벽 연속등반을 40시간54분 만에 마쳤다. 북벽 이동은 헬리콥터로, 하강은 패러글라이딩으로 했다. 요즘은 히말라야 8000m급을 얼마나 빨리 오르느냐는 것도 화제다. 브로드피크 16시간, K2 23시간, 낭가파르바트 24시간 단독등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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