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고급 위스키로 폭탄주? 명품입고 럭비하는 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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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0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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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코틀랜드 ‘싱글몰트 위스키 명가’ 맥캘란 르포

“폭탄주요? 그건 위스키를 버리는 짓(waste of whisky)입니다.”

기자가 폭탄주에 대한 의견을 묻자 맥캘란 증류소의 부공장장인 조지 크레이그 씨는 발끈했다. 스카치 위스키의 주요 소비국인 한국의 폭탄주 문화는 익히 알려진 터. 영국에도 마찬가지로 맥주를 들이켜고 바로 위스키를 원샷하는 ‘체이서(chaser)’라는 음주 문화가 있다. 그런데도 위스키를 ‘과격하게’ 마시는 행위를 질색하는 이유가 뭘까.

스코틀랜드 서부의 스페이사이드(스페이 강 유역이라는 뜻으로 위스키 증류소가 밀집한 지역)에 위치한 싱글몰트 위스키 맥캘란의 증류소를 찾아 제조 과정을 취재해보니 그 완고한 자부심을 이해할 수 있었다.

○ “싱글몰트는 테일러메이드”

위스키는 원료에 따라 몰트 위스키와 그레인 위스키로 나뉜다. 몰트 위스키는 100% 보리만 증류해 만든다. 맛과 향이 뛰어나지만 생산량이 많지 않다. 그레인 위스키는 옥수수와 호밀 등을 원료로 만드는데 그 자체로 상품화하지는 않고 몰트 위스키와 섞어 블랜디드 위스키를 만드는 데 쓰인다. 발렌타인, 조니워커 등 한국에 많이 알려진 위스키는 대부분 블랜디드 위스키다. 몰트 위스키 중에서도 한 군데의 증류소에서 생산된 것을 싱글몰트 위스키라고 하는데 맥캘란, 글렌피딕, 글렌리벳 등이 잘 알려져 있다. 블랜디드 위스키는 대부분 생산지 표시가 없지만 싱글몰트 위스키는 산지 표시를 매우 중시한다.

맥캘란의 데이비드 콕스 명품담당 디렉터는 “블랜디드 위스키가 백화점에 진열된 기성복이라면 싱글몰트 위스키는 한 명의 재단사가 만든 명품 맞춤 양복”이라고 비유했다. 블랜디드 위스키가 맛의 기준을 정해 놓고 여러 가지 원액을 배합하는 것이라면 싱글몰트 위스키는 발효와 숙성이라는 위스키 제조의 기본만을 충실히 따른다.

따라서 같은 ‘맥캘란 12년 숙성’ 제품이라도 올해 출시된 것과 작년에 출시된 것의 맛이 같을 수 없다. 원료인 보리의 질, 숙성을 담당하는 오크통의 상태, 숙성 정도를 판단하는 위스키메이커의 안목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미묘한 맛의 차이를 나타내는 것이다.

위스키 마니아들은 이러한 싱글몰트 위스키의 ‘자연미’를 음미하는 데 푹 빠지게 된다. 스페이사이드에 있는 한 위스키 바에 갔더니 좌석은 10여 개 안팎인데 위스키는 브랜드별, 연도별로 700여 개를 갖춰 놨다. 손님들은 위스키 목록을 보고 바텐더에게 ‘잔술’을 주문한 뒤 오랜 시간 향을 맡고 입술을 적시면서 맛을 탐닉하고 있었다.

스위스에서 온 한 관광객은 “난 향이 강하고 짜릿한 목넘김(피니시·finish)이 있는 위스키를 선호한다”며 “위스키는 한 잔만으로도 기분을 좋아지게 하는 묘약”이라고 말했다.

○ 70도짜리 ‘주정’은 정종 맛

몰트 위스키의 맛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첫 번째 요소는 보리다. 질 좋은 보리를 확보해 싹을 틔워 ‘몰트(맥아)’를 만드는 것이 위스키 제조의 첫 단계다. 보리에 물을 부어 불린 후 20도 정도의 온도를 유지하면 5일 정도 지나 싹이 트면서 전분이 생성된다. 이 보리를 다시 60∼74도의 온도로 건조시킨다. 위스키 중에 마치 훈제된 음식과 비슷한 ‘스모키’한 향이 나는 것이 있는데, 이는 보리를 말릴 때 땔감으로 ‘피트(이탄)’라는 스코틀랜드 특유의 향기 나는 석탄을 썼기 때문이다. 몰팅 단계에서 배어든 연기가 10여 년이 지난 숙성 원액에도 남아 있는 것.

몰트가 완성되면 다음 단계는 증류다. 잘게 빻은 몰트에 물과 이스트를 첨가하면 전분이 당분을 거쳐 알코올로 바뀌는 발효 과정이 진행된다. 48시간 발효 후에 얻어지는 알코올 도수는 약 8도. 실제로 거대한 발효통을 들여다보니 거품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황금빛 액체가 맥주 냄새를 풍겼다.

맥주와 비슷한 이 발효액을 증류기에 넣어 끓이면 알코올이 추출된다. 물보다 비등점이 낮은 알코올이 먼저 기체로 바뀌어 날아가는데, 이 알코올 증기를 구리로 만든 나팔 모양 관으로 채집해 방울방울 떨어뜨린 것이 알코올 도수 70도 안팎의 ‘주정(酒精·spirits)’이다.

물리적으로는 단순한 원리이지만 실제 증류 과정은 간단치 않다. 초벌 증류로 20도 안팎의 ‘로 와인’을 추출하고 이를 2차 증류해 순도 높은 알코올을 얻는다. 2차 증류에서 최상의 주정을 선별해 내는 것이 각 위스키 제조사의 노하우. 너무 강하거나 함량이 안 되는 알코올은 버리고 알코올 도수와 투명도가 적당한 것만 취하는 것이다. 콕스 씨는 “맥캘란은 추출되는 알코올의 16%가량만 주정으로 쓴다”며 “이는 스코틀랜드 증류소 가운데 최저 수준으로 양보다 질을 우선하는 것”이라고 자랑했다.

무색투명한 주정을 직접 마셔봤더니 70도의 ‘독주’인 만큼 혀와 목구멍이 얼얼하고 코로 더운 김이 훅 올라왔다. 그러나 맛과 향은 청주나 증류식 소주와 같이 구수한 곡물 느낌이었다.

입술→혀→목젖 차례로 적시며 음미하고 탐닉하라

○ 오크통은 ‘중고품’만 쓴다

주정은 오크통에 담아 숙성시킨다. 법적으로는 3년 이상 숙성해야 위스키라 부를 수 있고, 유명 브랜드는 대체로 10년은 돼야 상품으로 내놓는다.

위스키의 각양각색 맛을 결정하는 것이 바로 오크통이다. 그런데 위스키 숙성에 사용되는 오크통은 모두 ‘중고품’이다. 와인 등을 담갔던 오크통에 다시 주정을 넣는 것. 그러면 참나무향과 와인의 향이 한꺼번에 주정에 배어든다. 따라서 어떤 와인을 담근 통을 쓰느냐에 따라 브랜드 특징이 결정된다.

많이 쓰이는 종류는 ‘셰리’라는 포도의 일종을 담갔던 통과 옥수수 증류주인 버번을 담갔던 통이다. 셰리는 스페인, 버번은 미국에서 주로 담근다. 각 오크통의 위스키를 시음해봤다. 셰리 오크통은 건포도와 같은 단 과일 맛에 찌르르한 느낌이 강했다. 콕스 씨는 그 찌르르한(spicy) 맛은 타닌 성분이 많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초콜릿 맛이 강한 것도 특징이다.

버번 오크통은 맛이나 색이 상대적으로 연하다. 또 초콜릿보다는 바닐라향이 느껴지는데, 스트레이트로 즐기기보다 요리와 함께 마시면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정은 이 오크통에서 숨을 쉬고 잠을 자며 위스키로 변해간다. 숙성 기간이 오래될수록 향이 깊어지고 쏘는 맛이 강해진다. 또 위스키가 끈적끈적해지는데, 이는 유리잔에 위스키를 붓고 살짝 흔든 뒤 유리잔 벽면을 타고 흘러내리는 위스키를 관찰하면 단번에 알 수 있다.

하지만 숙성 기간이 긴 위스키가 비싼 이유가 단순히 품질이 좋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크통 속의 위스키는 매년 2% 정도 증발한다. 이를 ‘천사의 몫(Angel's share)’이라 부른다. 따라서 숙성 기간이 오래될수록 오크통을 열었을 때 원액이 얼마 남아있지 않다. 희소성의 원칙이 적용되는 것이다.

위스키 제조사가 오크통에 기울이는 정성은 각별하다. 600여 종에 이르는 참나무 중에 20여 종만 오크통으로 쓸 수 있고, 수령이 75년은 돼야 한다. 베어낸 참나무는 최소 2년간 건조시킨 후 오크통을 만든다. 또 오크통은 와인을 담기 위해 2, 3년간 ‘출장’을 다녀와야 하니 오크통 준비에만 5년 넘게 걸리는 셈이다. 위스키가 잘 팔린다고 금방 생산량을 늘릴 수 없는 이유다.

하지만 위스키를 채운 오크통을 보관하는 데는 별다른 비법이 없었다. 맥캘란 관계자는 “특별히 창고의 온도나 습도를 조절하지 않는다. 아마 무더위가 없고 선선한 바람이 부는 스코틀랜드의 기후가 최적의 환경을 제공하는 모양”이라고 말했다. 해인사의 장경판전과 같은 ‘과학’을 기대했던 기자는 약간 허탈했다.

물을 만나면 예술이 된다

○ 싱글몰트 위스키 100% 즐기기

영국의 코미디언 칙 머레이씨는 “위스키에는 두 가지 법칙이 있다. 위스키를 물 없이 마시지 말 것, 물을 위스키 없이 마시지 말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그만큼 싱글몰트 위스키를 즐기는 데는 물이 필수다. 물을 타서 먹는 이유는 독한 술을 순하게 만들려는 것이 아니다. 스트레이트로 마실 때와 다른 맛과 향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일단 위스키 한 잔을 유리잔에 붓고 색과 향을 음미하라. 그 다음 반 잔만 입에 머금으면 톡 쏘는 강한 단맛을 느낄 수 있다. 나머지 반 잔에는 1 대 1 비율로 물을 섞는다. 쏘는 맛 대신 풍부한 과일향이 코와 입을 감싸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식전주로는 소다수 칵테일도 좋다. 위스키와 소다수를 3 대 2 비율로 섞은 뒤 레몬이나 라음 즙을 떨어뜨려 마시면 입 안이 개운한 것이 식욕을 돋운다. 하지만 콜라와 같이 향이 강한 음료를 싱글몰트 위스키와 섞는 것은 금물이다.

글=스페이사이드 김준석 기자 kjs359@donga.com
디자인=공성태 기자 coon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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