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한 현실에 유서를 남기다

  • 입력 2009년 10월 13일 02시 4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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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우림, 7집 이어 제목 없는 미니앨범
어두운 느낌 강조… “공연보다 소리 집중”

‘홀수는 발랄, 짝수는 우울.’

록 밴드 ‘자우림’ 팬들이 이야기하는 앨범 분위기의 패턴이다. 보컬 김윤아는 “의도적 변화가 아니다”라고 했지만 1, 2집부터 시작한 명암 대비는 갈수록 뚜렷해졌다. 지난해 7집 ‘루비 사파이어 다이아몬드’로 6집 ‘애시스 투 애시스(ashes to ashes)’의 우울함을 털어내나 싶더니, 최근 발표한 EP(Extended Play·미니앨범)에서는 마지막 트랙의 가사처럼 “괴롭고 씁쓸한 숙취”에 빠졌다.

음반 제목은 없다. 잿빛 재킷에 밴드 이름만 자그맣게 적어놓았다. 해설지에는 수록한 여섯 곡 가사 외에 다른 텍스트가 보이지 않는다. 굳이 설명하지 않을 테니 자유롭게 이해하라는 의도다. 하지만 첫 곡 ‘매그놀리아(magnolia)’의 가사를 읽는 순간부터 자유롭게 이해하기 껄끄러워진다. “당신은 보고 싶은 것만 보는군. 끔찍해. 당신이 나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똑바로 보란 말이야….”

가사를 명료하게 전달하기 위한 보컬 보정 작업은 거의 하지 않았다. 그로 인한 소리의 모호함이 노래의 어두운 느낌을 한층 강조한다. “세상은 완전히 끝장날 때까지 절대 변하지 않을 거야”라고 하는 ‘매그놀리아’ 중간 소절. 김윤아는 ‘세상(world)’의 멜로디 위에 ‘절대(never)’라는 단어를 부웅 울리는 기계 소음처럼 건조한 속삭임으로 얹었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세상은 끝장날 때까지 계속 변해갈 거야”로 들린다.

타이틀곡인 네 번째 트랙 ‘螺絲(나사)’는 더 암울하다. 현실에 좌절한 젊은이가 자살하기 전 어머니에게 쓰는 유서가 가사의 내용이다. “우리가 그린 미래는 드라마에 불과한 공상”이라는 부분을 김윤아는 멜로디 없이 내레이션으로 읊조린다. 2007년 낳은 아들 민재에게 기성세대가 정해놓은 성공의 코스를 강요하지 않겠다는 다짐. 겉모습만 그럴듯한 소모품(나사)으로 자식을 기르지 않기 위한 자기 경계다.

자우림은 이번 앨범을 선보이는 공연 활동은 하지 않을 예정이다. 김윤아는 내년 봄 발표할 솔로앨범 작업에 한창이고, 다른 세 멤버도 동료 밴드의 음반 프로듀싱(이선규)과 공연무대 디자인(구태훈) 등 개별 활동을 시작했다. 자우림 스스로 밝혔듯 이번 EP 수록곡은 라이브 무대에서 연주하기 적합하지 않다.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잊고 소리에만 집중한 작업. ‘자줏빛 비가 내리는 숲(紫雨林·자우림)’의 어둑한 속내가 드러났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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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택균 문화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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