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찻잔속 세상과 통하니 내 그림도 보이네요

  • 입력 2009년 9월 4일 02시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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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얼차 전도사 나정우 화백

차호(茶壺·주전자 모양의 용기)에 찻잎이 담기고, 이어 끓는 물이 가득 고인다. 잠시의 기다림. 차호에서 흘러내리는 붉은 줄기에서 수증기가 피어오른다. 따뜻하게 데워진 찻잔을 감싸는 두 손이 조심스럽다. 한때 붓을 놀리던 손이다. 이제는 다구(茶具)에 익숙한 듯하다. 나정우 화백(48)이 붓을 놓고 찻주전자를 잡은 지 벌써 5년째.

그는 1987년부터 20여 년간 100여 회의 단체전에 작품을 내고, 2001년부터 5차례 개인전을 연 중견 화가다. 그런 그가 푸얼차(普이茶·보이차)에 빠지면서 붓을 내려뒀다.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지내던 독을 빼고 소통하는 법을 배우는 중이란다.

나 화백을 만난 곳은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 위치한 지유명차의 차예관(茶禮館). 갤러리라 해도 손색없을 정도로 곳곳에 그의 그림이 걸려 있는 이곳 매장에서 나 화백은 3개월째 점장 수업을 받고 있다. 그는 아예 푸얼차 전도사로 나설 채비를 하고 있다.

―왜 그렇게 푸얼차에 푹 빠지게 된 건가요.

“고등학교 때부터 20년 가까이 붓을 놓은 적이 없었어요. 학교 때는 축축한 지하에서 물감 냄새에 취해서 그림을 그렸고, 졸업 후에는 가난한 화가니까 화통 짊어지고 여기저기서 선잠 자가며 그려댔고, 어느 정도 안정된 뒤에도 좁은 화실에 박혀서 온통 그림 생각만 했어요. 그러면서 몸이 망가졌나 봐요. 푸얼차를 마시면서 내 몸이 얼마나 상해 있는지를 알게 됐어요.”

그러면서 사진 몇 장을 내밀었다. 살집 붙은 몸에 강한 인상의 그가 있었다.

―젊었을 때 사진이네요.

“10년 전인데 살도 찌고 인상도 안 좋죠. 그림 그린다면서 내 안에만 사로잡혀 있었어요. 그땐 그랬죠. 집, 화실만 오가면서 열심히 사는데 집안 식구들은 왜 그리 불평인가. 아집에 빠져서 다른 사람 이야기에는 관심도 안 가지니 아내나 주위 사람들이 불만이 많았던 거죠. 차를 만나면서 건강도 찾고 소통하는 법을 배우게 됐어요.”

―푸얼차가 몸에 좋다고는 많이 알고 있죠.

“푸얼차가 발효차잖아요. 속을 따뜻하게 해주죠. 푸얼차를 무슨 만병통치약처럼도 얘기하는데 원리는 하나예요. 요즘 사람들 배 속은 차고 머리는 뜨겁잖아요. 그러니 병명 없는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죠. 푸얼차는 배 속을 따뜻하게 해주고, 머리 쪽 열을 끌어내려요. 몸이 편해지고 머리가 맑아지는 거죠.”

―그런데 소통은 무슨 의미인가요.

“몇 시간씩 대화를 가능하게 해주는 게 술과 차인데, 술은 몸에 안 좋죠. 푸얼차는 카페인이 든 다른 차와 달리 물처럼 마셔도 좋아요. 물을 데우고, 한 잔 두 잔 차를 나누다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죠. 저희 집 풍경도 바뀌었어요. 아이들 커서 제 할일 하다보니 가족끼리 식사 한 번 하기도 힘들었는데, 푸얼차를 하면서 집 안에 웃음꽃이 피게 됐어요. 저녁에 둘러앉아 차를 마시면서 대화를 하게 된 거죠.”

나 화백은 이야기 도중 ‘소통’이란 말을 반복했다. 현재 그가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 역시 소통이다. 그가 시 한 편을 읊조렸다. “(중략) 차 한 모금이 목으로 넘어간다/뜨거운 기운이 온몸에 퍼질 때/내 몸은 비로소 알게 될 것이다/태양과 바람과 고독과 아름다운 이들의 마음을….”

―자작시인가요?

“‘빨간 자동차’라는 수필집을 올 초에 냈는데, 거기에 실었던 시예요. 2004년 겨울 즈음 일산 호수공원을 산책하면서 ‘보이차’라는 현수막을 내건 빨간 자동차를 만나게 됐어요. 처음엔 노점상 정도로 생각하고 지나쳤죠. 그런데 차를 건네는 정성이 보통이 아니었어요. 산책길 나선 사람들에게 좋은 차를 먹이려고 새벽에 경기 과천, 강화의 물 좋은 약수터를 찾아다녀요. 찻잎도 중국 윈난(雲南) 성에서 한 잎 한 잎 따내 최소 20년 이상을 발효시킨 건데, 차 한 잔이지만 그 속에 담긴 정성이 대단하잖아요.”

그는 그 정성 덕분에 푸얼차와 인연을 맺었으니, 자신도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즐거움을 나누고 싶다고 했다. 그가 잠시 붓을 놓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다시 그림을 그리고 싶지는 않나요.

“한 5년 그림을 그리지 않았는데, 이제야 내 그림이 객관화돼서 보여요. 예전에도 생명과 빛을 그리고 싶었어요. 그런데 그림을 보면 빛을 그렸지만 정작 전체적인 분위기는 어두워요. 마음이 닫혀 있었으니까요. 지금은 찻잔에 비친 해 한 조각에 감동하고, 날아가는 새의 파닥거림에 생명력을 느껴요. 다시 그리면 정말 마음에 드는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조금 더 공부를 해야죠.”

그는 그림을 쉬는 동안 독서모임에 나가 차와 책을 나누고, 서양미술사를 공부했다. 그리고 현재의 차예관에서 서양미술사를 주제로 세미나도 연다. “그림도 문화고, 차도 문화잖아요. 차를 매개로 좋은 사람들과 소통하는 문화를 만들고 싶어요.” 그가 다시 조용히 찻잔을 들었다.

강혜승 기자 fined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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