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먼로는 활짝 웃고 있는데…

  • 입력 2009년 8월 1일 02시 57분


1954년 주한미군 위문공연을 위해 방한했던 메릴린 먼로. 전쟁 직후의 암울함과 대비되는 젊고 아름다운 스타의 모습은 이지민 작가에게 영감을 주었다. 사진 제공 그책
1954년 주한미군 위문공연을 위해 방한했던 메릴린 먼로. 전쟁 직후의 암울함과 대비되는 젊고 아름다운 스타의 모습은 이지민 작가에게 영감을 주었다. 사진 제공 그책
◇나와 마릴린/이지민 지음/256쪽·1만 원·그책

‘모던보이’ 작가 이지민 씨 메릴린 먼로 통역사 눈으로 6·25전후 욕망과 상처 그려

식민지 경성에서 벌어진 연애사건을 다룬 영화 ‘모던보이’의 원작자 이지민 작가가 또 한 권의 시대물을 내놓았다. 배경은 1950년대 6·25전쟁 전후의 서울. 피폐한 도시뿐 아니라 사람들의 기억 속에도 전쟁이 할퀴고 간 상처가 고스란히 남아있던 때다. 개선의 여지가 없어 보이는 암울함이 지배하던 시대, 신의 가호마저 비켜갈 것 같은 이곳에 역사의 굴곡을 정면으로 통과해낸 한 여자의 파란만장한 연애사가 살아 숨 쉬고 있다.

주인공이자 화자인 앨리스 J. 김은 미군에서 통역 및 번역 일을 하는 여성. 그는 예명과는 달리 본명이 김애순인 토종 한국인인데, 하얗게 세어 버린 머리칼을 감추기 위해 맥주로 머리를 감아 싯누렇고 거친 머릿결을 가진 데다 짙은 화장, 짧은 치마에 해어진 장갑을 끼고 앞코가 다 닳은 구두를 신은 괴이한 모습을 하고 있다. 도쿄에서 미술을 전공한 화가이고 전쟁 중에는 ‘삐라’에다 선전용 포스터를 줄기차게 그렸지만 이제는 붓을 완전히 꺾어버렸다.

독자들은 드문드문 엿보이는 짧은 회고를 통해 전쟁의 어떤 참혹한 경험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이 무렵 앨리스가 일하는 미군부대는 때마침 환희와 감격에 한껏 고무돼 있다. 세기의 섹스 심벌인 영화배우 메릴린 먼로가 위문공연을 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하기 때문이다. 앨리스는 이 월드스타의 한국 순방에서 통역을 맡게 된다.

전후의 어지럽고 음울한 군사기지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아름답고, 젊고, 눈부신 스타와 동행하는 동안 앨리스는 뜻밖에도 과거의 흔적들과 마주치는 사건들을 계속해서 겪게 된다. 앨리스는 철부지였던 스무 살 무렵, 미군정의 공보처에서 일하는 엘리트 남성 여민환과 사랑에 빠졌다.

그는 이미 가정이 있는 남자였다. 스무 살 여자가 감당하기에 결코 쉽지 않은 이 연애는 여민환의 친구이자 미군 장교와 일본인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 조셉이 끼어들면서 완전히 뒤엉켜버린다. 가정과 정부 사이에서 흔들리는 여민환에 대한 앨리스의 분노와 원망은 엉뚱하게도 조셉과의 부적절한 관계로 이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 6·25전쟁이 일어나고 이들 사이에 얽힌 애증의 고리는 예상하지 못했던 파국을 향해 치닫는다. 앨리스가 유치한 복수심에 반쯤 장난으로 여민환의 아내에게 보낸 편지가 평생의 죄책감을 남긴 사건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생지옥과 같던 전쟁 속에서 살아남게 된 앨리스. 누가 누구를 배반했는지, 그 사이 어떤 말하지 못할 끔찍한 일들이 있는지는 소설의 후반부에 가서야 전모를 드러낸다. 소설에서 먼로의 비중은 생각했던 것보다 크지 않지만 주인공 앨리스는 그녀와의 동행이 끝날 때쯤 전쟁이 남긴 가슴 아픈 기억과 스스로를 옭아매는 강박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워지게 된다. 등장만으로 모든 군인들과 기자들, 시민들을 아우성치게 했던 먼로의 존재는 결과적으로 앨리스에게도 같은 위안을 준 셈이다.

작가는 두 장의 사진을 보고 이 소설의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유엔군과 북한군 포로 사이에서 통역하던 여자 통역사의 사진과 전쟁 직후 미군 위문공연을 왔던 먼로의 사진이 그것이다. “완전히 다른 이 두장의 사진을 보면서 나는 똑같은 질문을 떠올렸다. ‘이렇게 젊고, 아름답고, 꿈 많던 여자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죽음의 비의를 깨달은 한 생명으로서 생명의 본분을 다하려 그렇게 악착같이 빛을 뿜어냈던 것은 아닐까.’”(‘작가의 말’ 중에서) 어느 때보다 어둡고 암울한 시대를 배경으로 억눌린 욕망과 상처를 다뤘지만 위악적인 화자의 입담, 빠른 사건 전개와 반전 덕에 무겁지 않게 잘 읽힌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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