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통일 이룬 김춘추 외세의존 잣대로 과소평가는 부당”

  • 입력 2009년 6월 17일 03시 00분


연구서 펴낸 이종욱 교수 “당시엔 단일민족 개념 없어”

최근 인기몰이 중인 MBC 드라마 ‘선덕여왕’ 중 미실이 이야기는 1989년 공개된 ‘화랑세기’ 필사본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신라의 문장가 김대문이 7세기 말 여러 화랑의 생애를 쓴 ‘화랑세기’의 원본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다 1989년과 1995년 한학자 박창화(1889∼1962)가 쓴 필사본이 공개됐다. 학계에선 진위 논란이 일었고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다.

서강대 13대 총장으로 선임돼 27일부터 4년 임기를 시작하는 이종욱 교수(사학과·사진)는 이 필사본을 진짜라고 보는 학자다. 이 교수가 ‘화랑세기’를 중심으로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기록을 곁들여 신라 29대 무열왕(김춘추)의 생애와 업적을 정리한 책 ‘춘추(春秋)-신라의 피, 한국·한국인을 만들다’(효형출판)를 펴냈다.

이 교수는 우선 춘추가 왕위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을 상세히 소개했다. 그는 “신라 때는 성(姓)을 그다지 중시하지 않았다”면서 인물들의 이름만 썼다. 이 교수의 말에 따르면 춘추는 성골에서 진골로 신분이 떨어진 뒤 진골 출신으로는 최초로 왕이 된 인물이다. 할아버지인 25대 진지왕이 즉위 3년 만에 폐위되자 아버지 용수와 더불어 진골로 격하됐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미실이라는 여인이 이 과정에 깊숙이 개입했다”고 설명했다. 24대 진흥왕이 사망하자 왕비인 사도는 진지왕을 새 왕으로 옹립한 뒤 조카 미실을 왕비로 맞을 것을 강요했다. 진지왕이 반대하자 사도와 미실이 진지왕을 내쫓고 진평왕을 새 왕으로 추대했다는 얘기다. 진골로 강등된 춘추는 이후 화랑도에 깊숙이 관여하면서 김유신과 교분을 나눴고, 이모인 선덕이 왕위에 오른 뒤 왕의 주변에서 큰 역할을 했다고 이 교수는 설명했다.

이 교수는 춘추에 대한 역사학계의 평가에 대해 불만을 나타냈다. 그는 “춘추에 대한 역사학계의 평가는 대부분 ‘외세를 빌려 동족 국가를 망하게 함으로써 민족의 무대를 축소했다’는 식이었다”면서 “이는 광복 이후 소위 민족사를 표방해온 한국사학이 그렇게 가르쳐왔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민족’ 개념에 대해 발상전환이 필요하다면서 “춘추에게 민족을 강요하지 말라”고 주문했다. 당시 신라, 백제, 고구려인은 같은 민족이라는 생각을 가진 적이 없었고 그들을 단일 민족으로 ‘발명’해낸 것은 민족사를 내세운 역사가들이라는 것이다.

이 교수는 또 “국제적 감각을 가졌던 춘추는 당나라의 제국적 위상을 인정했고, 강력한 상대를 만나 덮어놓고 덤비는 무모한 정치 지배자가 아니었다”면서 춘추가 당나라의 힘을 적절히 사용했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춘추는 한국 역사를 하나로 묶어 대신라(통일신라), 고려, 조선을 거쳐 오늘의 우리에게 전해준 영걸한 군주인데도 TV 드라마에선 춘추를 영웅으로 다룬 적이 없다”고 지적했다.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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