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엇갈린 선택의 비극… 파국으로 내달린 24시간

  • 입력 2009년 5월 23일 02시 59분


◇어느 완벽한 하루/멜라니아 마추코 지음·이현경 옮김/528쪽·1만2000원·랜덤하우스

사회적 지위―재력 정반대 두가족
상대 가족 부러워하지만 실상은…

로마. 5월의 어느 밤, 카를로 알베르토 가의 한 아파트에서 총성과 비명이 들린다. 누군가의 신고로 경찰이 출동한다. 무료함과 적막이 동시에 흐르는 밤 풍경. 이들은 이 신고가 한밤중 누군가의 단순한 장난일지, 혹은 끔찍한 범죄를 알리는 예고일지 알 수 없다. 적어도, 문을 열어보기 전까지는.

이탈리아 작가 멜라니아 마추코(사진)의 최근작인 이 작품은 경찰의 출동을 기점으로 24시간 전으로 시간을 되돌린다. 작가는 이 아파트의 평범한 한 가정에서 총성이 들리기까지, 어떤 일이 진행되고 있었는지 되짚는다. 오전 1시부터 24시간 동안 이혼당한 현직 경찰관 안토니오의 가족과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 변호사 엘리오 가족의 하루가 펼쳐진다. 각자의 고민과 번뇌, 과거의 상처와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버거워하는 이들의 하루는 제목처럼 완벽해 보이지만은 않는다. 사실은 완벽한 파행에 가까운 하루다. 총성이 들리는 시점까지 내달려오는 소설 속 등장인물 중 누구도, 그리 행복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안토니오는 생의 괴로움에 가득 차 있다. 성실하고 준수한 경찰관이지만 아내 엠마로부터 이혼을 당한 데다 법에서 정한 날 외에는 아이들을 만나지 못한다. 그에게 남은 것은 오직 일뿐이지만, 그마저도 국회의원에 출마한 엘리오의 경호를 담당하며 사설 경호원 취급을 당하고 있다. 그는 모든 기력을 쏟아 엠마를 스토킹한다. 하지만 엠마로선 그에게 돌아갈 필요를 조금도 느끼지 못한다. 그의 폭언, 폭력, 편집증 등을 더는 인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남편과 이혼한 뒤부터 비정규직 아르바이트를 전전해야 하고, 사춘기를 맞은 큰딸 발렌티나와 사사건건 갈등을 빚지만 재정적인 이유 때문에 그에게 다시 속박당하고 싶진 않다.

문제는 상류층인 엘리오의 가족에게도 있다. 선거를 코앞에 둔 엘리오는 악몽에 시달린다. 그는 이미 이 도시의 유명인사이자 성공한 정치인이지만, 이번 선거에서 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영혼을 잠식한다. 그는 간발의 차로 라이벌에게 패하는 꿈을 꾸고 절망과 망상에 사로잡혀 새벽잠을 설치지만 두 번째 아내인 마야는 그의 절박함에는 무관심하다. 모든 것이 지루할 만큼 풍족한 생활에 대한 무료함과 선거에 목을 매는 남편에게 애정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엘리오가 전 부인과의 사이에서 얻은 아들 제로는 무정부의자로 아버지와는 정반대의 길을 걷는 데다 아버지의 젊은 아내 마야를 사랑한다.

이 두 가족의 막내인 케빈과 카밀라는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같은 유치원에 다니는 친구 사이다. 아이들 때문에 안면을 트면서 상대 가족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양쪽 부모는 서로를 동경한다. 적어도 겉으로 볼 때 엘리오 가족은 부족함을 느껴본 적 없는 부유한 삶, 교양 있고 단란한 가족의 표본이다. 안토니오의 가족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타인의 시선이나 경제적 핑계로 이혼을 망설이는 대신 솔직하고 용감하게 자신만의 길을 찾고 서로에 대한 신뢰를 간직한 부부로 보인다.

하지만 수십 년에 걸쳐 이들의 삶을 조금씩 갉아먹어 온 권태와 증오, 불안과 반항 등이 5월 어느 날 밤, 수면 위로 오르게 된다. 안토니오가 언젠가 엠마가 자신에게 돌아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은 그녀가 생활고에 찌들어 두 아이를 키우는 데 지쳐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엠마는 그를 떼놓기 위해 ‘정규직으로 채용됐다’고 거짓말을 한다. 안토니오는 막다른 곳에 다다랐다는 절망과 함께 극렬한 복수심에 사로잡힌다.

엠마에게 복수하는 길은 무엇일까. 그녀를 영원히 고통스럽게 하는 방법은. 광기에 사로잡힌 그는 권총을 준비하고 두 아이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온다. 그날 밤, 엘리오는 최근 조사 결과 경쟁 후보에게 뒤처져 있고 막판 뒤집기로도 승산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소설은 다시 24시간 뒤로 돌아온다. 등장인물들이 24시간 동안 내린 수많은 엇갈린 선택들이 빚은 결말은 모순과 몰이해로 가득 찬 한 가족의 파국이자 온전하지 못한 삶을 사는 현대인들의 비극으로도 읽힌다. 촘촘히 맞물린 서사가 한 편의 영화처럼 흡인력 있게 전개된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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