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멋 그대로, 편리성 높이고… 한옥이 뜬다

  • 입력 2009년 5월 7일 10시 37분


제랄드 알렉상드르(35·프랑스)-이영열(39) 씨 부부는 화창한 날을 좋아한다. 아침부터 오후 늦게까지 마당 한 가득 들어차는 햇빛에 온 몸을 맡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비가 오는 날도 좋아한다. 처마를 타고 내린 빗방울이 바닥에 뚝뚝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 것은 색다른 즐거움이다. 눈이 오는 날엔 지붕과 마당에 눈이 소복소복 쌓이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들이 사는 서울 종로구 계동의 한옥을 찾은 4일 오전은 화창했다. 이들은 햇살 좋은 마당에서 조용하고 평화로운 연휴를 즐기고 있었다. 마당 한 쪽에선 철쭉이 가는 봄을 아쉬워하듯 활짝 피어 있었고, 지붕에서는 참새가 짹짹거렸다. 11개월 된 쌍둥이 아들 자노와 가비는 아직 잠에서 깨지 않았다.

알스톰코리아에 근무하는 부인 이영열 씨는 "나무와 돌로 지은 한옥에 살면서 자연과 가까워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며 "성냥갑처럼 비슷한 아파트보다는 항상 새로운 느낌이 드는 한옥이 좋다"고 말했다.

가회동, 계동, 원서동 등을 아우르는 북촌 한옥마을의 풍경이 많이 바뀌었다. 길을 걷다 보면 심심찮게 노랑머리 외국인을 만날 수 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묵는 사람이 많지만 한옥이 좋아 한옥에서 사는 외국인도 적지 않다. 한옥에 터를 잡는 우리나라 젊은 부부도 늘고 있다. 이들은 왜 '좁고', '춥고', '불편하다'는 인식이 심어져 있는 한옥에서의 삶을 선택한 것일까.

●한국적이라 매력적인 공간

알렉산드르-이영렬 씨 부부는 8년 간 아파트에 살다가 지난해 말 한옥으로 이사 왔다. 몇 해 전 우연히 삼청동과 북촌을 걷다가 이 동네의 매력에 빠졌고, 이후 이 곳은 단골 데이트 장소가 됐다. 지금 집을 찾는 데는 3~4년이 걸렸다. 정말 마음에 드는 집에서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경기도 일산의 프랑스어 학원에서 강사로 일하는 알렉상드르 씨는 "유럽 사람들은 예쁜 집에서 오랫동안 사는 것을 좋아한다"며 "우리에겐 한옥이 바로 그런 곳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의 전통을 간직한 한옥이 많고, 카페와 갤러리, 공방 등이 많은 북촌은 나 같은 외국인에게는 서울에서 가장 매력적인 공간"이라고도 했다.

어린 아이들을 키우고 있지만 크게 불편하지 않다는 게 이들의 설명이다. 이 씨는 "한 겨울 추울 줄 알고 보일러를 세게 틀었는데 심지어 반팔 차림으로 지냈다. 그래도 가스비는 한 달에 30만 원 정도 나왔다"고 했다. 오히려 아파트처럼 층간 소음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아이들이 마당에서 뛰놀 수 있는 게 반갑다. 여름이 오면 마당에 대야를 놓고 아이들에게 물놀이를 시킬 작정이다.

같은 날 계동부동산에서 만난 루이스(31·미국)-최경희 씨(31) 부부 역시 한옥을 찾고 있었다. 이들 역시 답답한 아파트 생활을 벗어나고 싶다고 했다. 최 씨는 "나보단 남편이 마당에서 개를 키우고 싶다며 한옥 생활을 희망한다"고 말했다.

이 부동산의 김재창 사장은 "최근 들어 한옥을 찾는 외국인의 발길이 부쩍 늘었다"며 "우리나라 젊은 사람 중에서도 한옥을 문의하는 사람이 많다. 구입이 힘든 사람들 중에는 전세로 사는 사람도 꽤 된다"고 말했다.

●한옥, 진화(進化)의 끝은 어디일까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한옥은 '천덕꾸러기'였다. 불편하고, 겨울에는 춥다는 게 이유였다. 하지만 최근 새롭게 리모델링하는 한옥들은 고유의 멋은 그대로 살리면서 생활의 편리성을 크게 높인 게 특징이다. 100채가 넘는 한옥을 고쳐 지은 한옥 전문 건축가인 김장권 북촌에이치알씨 대표는 "현대 한옥은 기본 틀과 외형, 자재 등은 유지하되 요즘의 문화와 시대성에 맞도록 짓고 있다"며 "지하 공간을 확보해 서재나 음악 감상실로 쓰거나 2층 한옥을 짓는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고 말했다.

건축 기술의 발달에 따라 요즘 한옥의 주방과 욕실 시설은 아파트 못지 않다. 월풀 욕조를 설치해 음악을 들으면서 목욕을 즐길 수 있는 곳도 있다. 이중 창호나 단열 필름 등을 사용해 단열을 막고, 빌트인 수납공간을 만들어 공간을 늘리기도 한다. 얼마 전 한옥으로 이사 온 이석우 ㈜동림피엔디 전무(44) 역시 지하 공간을 대대적으로 리모델링해 어지간한 갤러리 크기의 전시 공간을 만들었다.

이렇다 보니 한옥의 쓰임새도 다양해지고 있다. 2005년 가회동에 문을 연 'e-믿음치과'는 동네에서는 '한옥치과'로 더 유명하다. 이 치과에 들어서면 자그마한 뜰이 손님을 맞는다. 치료를 위해 의자에 누우면 한옥의 서까래나 마당의 뜰을 보게 된다. 통풍이 잘 돼 치과 특유의 소독약 냄새도 나지 않는다. 김영환 믿음치과 대표원장은 "환자들에게 편안함과 문화적 감동을 주면서 매출이 급성장했다"며 "이런 게 바로 '한옥의 힘'인 것 같다"고 말했다. 김 원장은 지난해 성북동에 제2호 한옥치과의 문을 열었다.

주방가구 전문업체인 한샘은 북촌의 한옥 여러 채를 사들여 디자인 연구소로 활용하고 있고, 노틀담수녀원은 서울시 소유의 한옥을 빌려 '한옥 어린이집'을 운영하기로 했다. 현재 시 소유의 한옥들은 공방이나 전시관 등으로 주로 쓰이고 있지만 앞으로 서울시는 '한옥 어린이 도서관'이나 '한옥 보건소' 등 한옥으로 된 주민편의시설을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한옥, 살고는 싶지만…

한옥이 매력적인 거주 공간으로 떠오른 건 사실이지만 한옥에 사는 게 쉽지만은 않다. 우선 한옥의 값이 너무 비싸졌다. 불과 2~3년 전만 해도 3.3㎡당 1000만~1500만 원이었던 시세가 요즘은 2000만~3000만 원으로 뛰었다. 방3개짜리 100㎡짜리 집을 사려면 6억~9억 원이 드는 셈이다. 전세로 살고 싶어도 매물이 별로 많지 않아 물건이 나오자마자 계약이 이뤄지곤 한다.

또한 아파트 생활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한옥은 내부 공간이 좁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주차 공간도 넉넉지 않아 차를 포기해야 하는 경우도 많다. 인근 부동산중개업소 관계자는 "한옥이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어지간한 마니아가 아니면 여전히 살기가 힘든 게 사실"이라며 "하지만 일단 한 번 살아보면 다시 아파트에서 살고 싶은 생각이 없어지는 게 한옥의 매력"이라고 말했다.

이헌재기자 u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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