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김주영의 그림 읽기]외톨이 여우, 친구 찾아 삼만리

  • 입력 2008년 12월 13일 02시 58분


십 년이 넘게 살아올 동안 여우에겐 살가운 친구 하나 없었습니다. 더욱 눈물겨웠던 점은 음산하기 그지없었던 땅굴생활 5개월을 보내는 동안 어느 누구로부터도 방문이나 위로를 받아본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여우는 겨우내 사뭇 혼자 웅크리고 엎드려 살 속까지 파고드는 치명적인 외로움으로 떨었습니다.

이유는 스스로가 버리지 못하는 멍에 때문이었습니다. 속임수에 능숙하고 교활하고 남을 곤경에 빠뜨리고 음험하고 비열하고 염탐하고 변덕스러우며 무엄하고 앙갚음 잘하고 딴죽 걸고 업신여기기 잘한다는 것이 여우가 가지고 있는 전통적인 습성이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여우의 음산하고 어두운 삶은 단 한 번도 누구에게 위로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따사로운 햇볕이 들녘을 촉촉하게 적시던 어느 봄날, 여우는 오랜 은둔생활을 끝장내고 땅굴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다가오는 겨울에는 결단코 그 음습한 땅굴 속에서 혼자 보낼 수 없어서입니다. 혼자서 생활하는 습성이 몸에 밴 다른 여우를 만나 일가를 이루며 산다는 것은 물론 손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간곡하게 바라며 길을 찾아간다면 뜻은 이루어지리라 믿었습니다.

봄날의 활기찬 풍경에 한껏 고무된 여우는 땅굴 밖으로 길게 뻗은 한 길을 바라보며 걷기 시작했습니다. 해가 뜨면 일어나 걷다가 해가 지면 다시 길가의 숲 속으로 들어가 잠을 청하는 일과를 수없이 반복했습니다. 수개월 동안 먼 길을 땀 흘려 걸었는데도 길은 끝이 보이지 않았고 만나게 되기를 간절하게 기대했던 다른 여우의 모습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언덕을 넘어가면 또다시 다른 언덕이 나타나거나, 개활지가 나타났다 하여도 몇 그루의 나무들이 서 있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여우는 그 길을 봄과 여름을 지나 가을까지 쉬지 않고 끈질기게 걸었습니다. 언덕이 있고 나무가 있고 숲이 나타나고 시냇물이 흘러가는 단조로운 풍경은 끝없이 이어졌습니다. 얼마나 오래 걸었던지 지구의 끝자락에서 다른 끝자락까지 걸었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여우는 결코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첫눈이 내린 그해 겨울 들머리쯤에, 문득 하염없이 이어지던 길이 끝나는 지점에 이르렀음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앞에는 길 대신 끝 간 데가 보이지 않는 드넓은 호수가 가로놓여 있었습니다. 호수의 수면은 진눈깨비가 풀풀 날리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거울처럼 맑고 잔잔했습니다. 수면에 수척하고 깡말라 볼품없는 늙은 여우 한 마리가 주둥이를 앞으로 쑥 내밀고 자신을 빤히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여우는 비로소 같은 종족의 여우를 만났음을 깨닫고 뛸 듯이 기뻐 날뛰었습니다.

작가 김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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