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소통]강운구 사진전 ‘저녁에’

  • 입력 2008년 11월 11일 02시 58분


12월 6일까지 열리는 사진작가 강운구 씨의 ‘저녁에’ 전에 선보인 ‘남해, 2007’(11x14인치). “사진의 핵심은 사실적 기록성”이라고 강조하는 작가의 아날로그 사진에는 풍경과 노동에 대한 객관적 시선과 더불어 사람의 따스한 온기가 스며 있다. 사진 제공 한미사진미술관
12월 6일까지 열리는 사진작가 강운구 씨의 ‘저녁에’ 전에 선보인 ‘남해, 2007’(11x14인치). “사진의 핵심은 사실적 기록성”이라고 강조하는 작가의 아날로그 사진에는 풍경과 노동에 대한 객관적 시선과 더불어 사람의 따스한 온기가 스며 있다. 사진 제공 한미사진미술관
8일 서울 송파구 방이동 한미사진미술관에서 열린 ‘작가와의 만남’에서 이야기하는 사진작가 강운구 씨. 사진 제공 한미사진미술관
8일 서울 송파구 방이동 한미사진미술관에서 열린 ‘작가와의 만남’에서 이야기하는 사진작가 강운구 씨. 사진 제공 한미사진미술관
《“내 사진은 하나 어려울 것 없는 사진입니다. 설명으로 괜히 어렵게 만드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이렇게 시작된 사진가 강운구(67) 씨와 관객 100여 명의 만남은 예정된 두 시간을 훌쩍 넘겼다. 서울 송파구 방이동 한미사진미술관(02-418-1315)에서 마련한 그의 ‘저녁에’전에 맞물려 8일 오후 3시 세미나실에서 열린 작가와의 만남. 》

“생의 저녁에 서니 사진 좀 흔들려도 다 용서가 되네요”

스스로를 ‘한쪽 구석에서 얌전하게, 숨도 살살 쉬며, 제 일이나 겨우 하고 있는’ 작가라고 말하는 그를 향한 관심은 뜨거웠다. 쏟아지는 진지한 질문에 작가는 뿌듯한 표정이었다. 관객에겐 남 앞에 잘 나서지 않는 작가의 육성을 듣는 흔치 않은 소통의 시간이었다.

시대적 흐름에 개의치 않고 ‘사실적 기록성’이 사진의 가장 중요한 덕목임을 강조하고 실천해온 작가. 7년 만의 개인전에서도 날것 그대로 현실에서 건져 올린 풍경과 사람 사는 모습이 ‘흙과 땅’ ‘연속사진’ ‘그림자’ 등 3부작 113점을 내놓았다. 현란한 테크놀로지를 활용해 화려하지만 어딘지 심심한 사진들과 달리, 세상의 가만가만한 소리에 귀 기울여가며 찍은 속이 꽉 차고, 간이 딱 맞는 작품들이다.

#사진의 길을 묻다

논두렁을 태우는 연기도, 돌부처 위에 작가의 그림자가 겹쳐진 사진도 대부분 저녁에 찍었다. ‘저녁에’란 제목엔 경치로서의 저녁이자, 작가의 나이도 저녁에 이르렀다는 이중적 의미를 담았다. 내내 사진에 대해 묻고 대답했으나 말 속에 삶의 지혜가 배어 있다. “나이 먹으니 포커스가 안 맞거나 흔들려도 용서가 되는 것 같다.(웃음) 옛날엔 벌벌 떨고 다시 찍었는데. 젊어서 용서 안 되던 것이 ‘저녁’ 때가 되니까 용서되더라. 실수한 것이 더러 보기도 좋더라. 흔들려도 좋을 때가 있더라.”

―직접 걸음을 옮겨가며 ‘연속사진’을 찍는 이유는….

“나는 줌 렌즈가 없다. 내 몸이 줌이 돼야 한다는 생각이다. 내겐 ‘디카’도 없다. 세상의 본질은 아날로그라고 본다. 디지털로 찍어도 최종의 것은 아날로그로 재생한 사진을 보는 것 아닌가. 새 기술이 트렌드를 바꾼 건 없고 사진만 커졌다. 근데 ‘크다고 좋으냐’를 따져봐야 한다.”

―흑백작업을 주로 하는 이유는….

“칼라의 울긋불긋한 잔소리가 싫다. 흑백은 잔소리가 없다. 흑백은 훨씬 추상적, 비현실적이면서도 현실을 솔직하게 빨리 드러낸다.”

―에디션은 몇 장까지 만드나.

“난 숫자를 안 매긴다. 나 스스로 양심을 걸고 많아야 스무 장을 넘지 않도록 한다. 근데 스무 장을 인화한 적은 없고 자동적으로 한 장에서 멈춘다.(웃음) 에디션을 따지는 것은 허풍이자 사치인 것 같다.(박수)”

#11월에 보는 ‘저녁에’가 더 아름다운 이유

렌즈를 통해 노동과 농촌을 기록해온 작가는 벽에 부딪쳤다. 수없이 찍어온 사진을 되풀이할 필요는 없다는 고민. “마음이 움직여야 셔터가 눌러진다. 40년간 찍다 보니 온갖 면역체계가 막강하게 작동해 웬만한 것엔 마음이 안 움직였다. ‘저녁’의 나이가 되니 가슴이 무뎌진 탓도 있을 거다. 이 두 가지 악조건을 어느 순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더니 새것을 찾을 수 있게 됐다. 그 결실이 이번 전시다.”

농부의 노동을 간접화법으로, 더 심도 있게 담아낸 발자국 사진은 그렇게 탄생했다. 사진을 찍는 자신의 그림자를 담은 사진도 변화의 흔적이다. 발자국이든 그림자든 한때 존재했지만 이젠 잡을 수 없는, 스러지는 존재와 순간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끝날 무렵, 한 여성 관객이 말했다.

“선생님의 ‘저녁에’는 다섯 시가 여섯 시에 양보하는 시간이자 훅과 백이 길항하는 시간, 노동을 종결하고 평화로운 관조와 휴식으로 들어가기 위해 더 많은 움직임이 있는 시간인 것 같다.”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시인 정희성). 오랜만에 마음을 움직이는 서정과 기품이 스며든 사진을 만나기 좋을 때다.

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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