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복을 빕니다]정진숙 을유문화사 회장

  • 입력 2008년 8월 23일 03시 02분


“한국출판의 역사 그 자체” 60여년 한우물

일제가 원고 강탈한 ‘조선말 큰 사전’ 10년 만에 완간

“출판이 사회 이끈다”… 1주일에 2권꼴 7000여종 펴내

“출판은 사회와 문화를 이끈다. 민족과 역사를 이끄는 견인차다. 내게 출판이란 천직은 주어진 것이 아닌, 삶의 결정(結晶)이었다.”(자서전 ‘출판인 정진숙’ 중에서)

22일 타계한 은석 정진숙 을유문화사 회장은 한국 출판 1세대로 평생의 삶 자체가 ‘문화보국’ ‘출판보국’의 역사였다.

일제강점기 조흥은행의 전신인 동일은행에 다니다 항일 혐의로 체포돼 옥중에서 광복을 맞았다. 광복 직후 위당 정인보(爲堂 鄭寅普) 선생으로부터 “36년을 빼앗긴 조선의 문화유산을 되찾으라”는 말을 듣고 조풍연(언론인·수필가) 윤석중(아동문학가) 민병도(금융인) 선생과 4인 동인체제로 출판인의 길로 들어섰다. 위당은 정 회장에게 “우리말, 우리글, 우리 민족의 혼을 되살리는 유일한 문화 사업이 출판이다”라고 당부했다.

을유문화사라는 이름은 조국 광복의 해인 을유년에 민족문화를 계승하고 발전시키겠다는 취지로 지은 것이다. 1946년 처음 낸 ‘가정 글씨 체첩’은 한글을 잃어버린 어린 세대들에게 문맹을 깨도록 하려는 책으로 이후 을유문화사는 한국 지식의 보고로 자리 잡았다.

정 회장은 60여 년 출판 한길 인생에서 7000여 종의 책을 펴냈다. 1주일에 2권꼴이다. 6·25전쟁 중 부산에 5평 임시사무소를 마련해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 등 책 발간을 멈추지 않았다. 전란의 와중에 창립 동인들이 흩어지자 1인 대표 체제로 전환했다.

1947년 10월 9일 한글날에 첫 권을 내놓은 ‘조선말 큰 사전’은 그의 업적으로 손꼽힌다. 조선어학회는 1930년대부터 사전 출간을 위해 자료를 수집했으나 1942년 일제에 원고를 강탈당했다. 1945년 9월 서울역 한국통운 창고에서 기적적으로 원고가 발견되자 정 회장은 재정 부족과 전란에 시달리면서도 “우리말 보존을 위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며 출판을 단행했다. 1947∼1957년에 걸쳐 모두 6권으로 완간된 ‘조선말 큰 사전’은 이후 국어사전의 기준을 제시했다.

고고학자 김재원 박사의 조언으로 1959∼1965년 발간한 ‘한국사’(전 6권)도 기념비적인 책이다. 한국 사학계의 연구 성과를 집대성한 이 책은 미국 록펠러 재단의 도움을 얻어 진단학회 학자들이 주축이 돼 만들었다. 특히 ‘한국사’는 1970년 최초의 영문 한국사 서적인 ‘더 히스토리 오브 코리아’로도 발간됐다. 정 회장은 자서전에서 “금전적인 손해는 상관없다. 해외에 한국의 역사를 제대로 알린다는 게 중요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이 같은 정 회장의 출판상업주의에 대한 경계는 출판계의 귀감이 돼 왔다.

1948년 박태원의 ‘성탄제’에서 시작해 88년까지 300종 가까이 발간한 ‘을유문고’는 국내 교양서적의 문고본 시대를 열고 독서 생활을 윤택하게 했다. ‘대학총서’ ‘구미신서’ ‘번역신서’ ‘세계문학전집’도 일본어판 중역을 벗어난 원작 번역과 분량에 구애받지 않는 완역으로, 국내 지식 문화를 고양시키는 디딤돌이 됐다.

정 회장은 또 1962년 제16대 한국출판문화협회장에 취임해 12년 동안 최장수 회장을 지냈다. 당시 발행한 ‘출판연감’(1963년)은 한국의 출판 자료를 체계화하는 초석이 됐다. 1969년에는 출판계 숙원이던 ‘출판금고’도 발족시켰으며, 1972년부터 이사장을 맡아 출판사업 지원에 헌신했다.

한국박물관협회 회장, 문예술진흥위원회 위원, 유네스코 한국위원 위원으로도 활동했으며, 대통령표창(1968년), 금관문화훈장(1997년), 유일한상(2007년)을 받았다.

올해 초 와병 전까지도 매일 오전 9시 정각에 사옥으로 출근해 손수 원고를 손질한 그는 “책과 더불어 사는 인생처럼 좋은 게 어디 있느냐. 출판을 천직으로 삼은 건 고마운 축복”이라고 말했다.

이날 빈소가 차려진 서울대병원 영안실에는 백석기 대한출판문화협회 회장, 박맹호 민음사 회장, 김경희 지식산업사 대표, 이기웅 열화당 대표 등 출판계 인사들이 참여해 고인을 추모했다.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화환을 보내 조의를 표했다.

박 회장은 “정 회장은 우리말로 된 변변한 책 한 권 없던 상황을 타개하고 현재의 출판문화를 존재케 한 한국출판의 거대한 뿌리였다”면서 “수많은 문인과 학자의 든든한 후원자요, 출판인과 편집자들의 훌륭한 귀감이 되신 분”이라고 추모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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