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소품도 인생 2막 있어요”

  • 입력 2008년 2월 21일 03시 00분


《‘팬텀’의 외로움을 감춰 주던 하얀 마스크, 복수의 피를 부르던 이발사 ‘스위니 토드’의 은빛 면도칼,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가 하염없이 고도를 기다리고 있던 자작나무, 범죄의 결정적인 증거가 된 ‘쓰릴미’의 금테 안경…. 공연이 끝나도 잊혀지지 않는 소품들이 있다. 상징적인 이미지로 관객의 마음에 남는 소품은 무대의 또 다른 주인공. 공연이 끝난 뒤 무대 세트와 소품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 세트와 소품의 고향, 광주

무대 세트 제작에만 수억∼수십억 원이 들어가는 대형 뮤지컬의 경우 공연이 끝나면 대부분 경기 광주시로 옮겨진다. 광주는 서울과 가까우면서 창고가 들어설 터를 쉽게 확보할 수 있어 국내 뮤지컬 제작사는 대부분 광주에 보관창고를 두고 있다. 30억 원이 넘게 든 ‘아이다’ 세트를 비롯해 ‘오페라의 유령’ ‘지킬 앤 하이드’의 세트와 소품, 의상이 모두 이곳에 있다. 광주에 보관창고를 6개 갖고 있는 신시뮤지컬컴퍼니의 정소애 실장은 “창고 관리와 보관료만 월 800만 원가량 든다”고 말했다.

한국어 버전으로 공연 중인 프랑스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의 경우 상징적인 무대 세트인 대형 종과 석고상은 한국 공연이 끝나면 ‘고국’으로 돌아간다. 이 세트는 모두 프랑스에서 사용된 오리지널 무대를 1년간 임차한 것.

1995년 ‘명성황후’ 초연 때 사용된 높이 2m의 ‘경복궁’ 모형 세트는 현재 보관돼 있지 않다. 이 세트를 제작한 무대미술가 박동우 씨는 “세트가 너무 크다 보니 순회공연 시 이동성이 떨어져 뉴욕 공연 때는 60% 정도로 크기를 줄여 다시 제작하고 초연 때 경복궁 세트는 폐기했다”고 말했다.

○ 재활용되는 무대

2005년 공연된 뮤지컬 ‘겨울 나그네’에서 무대 배경으로 사용된 자작나무는 이후 창고 신세를 지다가 지난해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공연된 연극 ‘시련’을 통해 화려하게 부활했다. 막이 오르자마자 나오는 숲 장면에서 멋지게 재활용돼 호평을 받았다.

영세한 대학로 극단들은 제작비 절감 차원에서 소품을 돌려쓰기도 한다. 연극 ‘그녀의 봄’에 쓰인 소파는 공연이 끝난 뒤 극단 백수광부로 넘겨졌고, 연극 ‘부부 쿨하게 살기’에 쓰인 의상도 극단 놀땅의 ‘연애 얘기 아님’에 다시 등장하기도 했다.

공연기획사 김의숙 파임 대표는 “공연이 끝날 즈음이면 다른 극단에서 필요한 물품을 찍어 연락해 온다”며 “극단들끼리 좀 더 체계적으로 소품을 돌려쓸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의상도 마찬가지. 현재 공연 중인 ‘맘마미아’에서 여주인공인 ‘도나’가 입는 의상은 2004년 초연 때 제작된 것. 당시 더블캐스팅이어서 두 벌밖에 제작하지 않은 탓에 트리플 캐스팅인 요즘은 세 여배우가 나눠 입어야 한다. 공연 횟수가 가장 많은 최정원이 한 벌을 입고 이재영과 김선경이 나머지 한 벌을 번갈아 입는다. 문제는 하루에 2회 공연을 하는 주말. 낮 공연은 이재영이, 저녁 공연은 김선경이 무대에 서기 때문에 의상팀은 낮 공연이 끝나자마자 이재영의 몸에 맞춘 의상을 손질해 김선경의 사이즈에 맞게 수선해야 한다.

예산이 빠듯한 대학로 연극은 대개 의상을 협찬받는데 고가의 의상은 공연이 끝나면 반납한다. 연극 ‘클로저’에 출연했던 탤런트 김지호의 의상은 디자이너 브랜드 ‘구호’에서 협찬 받은 것으로 공연 후 반납했다. 대학로 작은 극단은 아직은 인심이 후해 공연이 막을 내린 뒤 배우들이 부탁할 경우 출연 의상이나 소품을 슬쩍 주기도 하지만, 규모가 큰 제작사들은 사소한 소품 하나라도 모두 회수한 뒤 다음번 재공연 때 사용하는 게 원칙이다.

연극 ‘노이즈 오프’에서 여배우 역의 ‘비키’가 입고 등장한 브래지어와 팬티처럼 남이 다시 입기 힘든 속옷은 어떻게 처리될까? 제작사인 동숭아트센터 측은 “세탁해서 창고에 보관 중이다. 속옷도 엄연히 제작사가 마련한 ‘의상’인 만큼 무조건 돌려받는 게 원칙”이라고 말했다.

강수진 기자 sjk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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