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김주영의 그림 읽기]늙은이는 추억만으로도 도움이…

  • 입력 2007년 9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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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 작은 할머니 한 분이 횡단보도 길턱에 서서 빨간불이 켜진 맞은편 신호등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습니다.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는 20초 동안 재빨리, 그리고 탈 없이 길을 건너야 하겠다는 또렷한 의지가 노파의 두 눈에 진지하게 묻어납니다. 젊은 나이에서 늙은이가 되기까지 남에게 거추장스러운 존재가 되기를 삼갔던 할머니로서는 당연한 것이겠지요. 할머니 곁에는 역시 보행신호를 기다리는 ‘똥싼 바지’의 청년이 서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똑같이 하반신을 조금씩 흔들고 있습니다. 흔들고 있는 까닭은 서로 다릅니다. 할머니는 하반신을 올곧게 지탱하느라 흔들리는 것이지만, 청년의 하반신은 MP3 플레이어에서 흘러나오는 빠르고 흥겨운 힙합 음악과 함께 흔들리고 있습니다.

드디어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었습니다. 할머니가 지체하지 않고 한 발짝을 횡단보도 위로 내딛습니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줄곧 그 곁에 서 있었지만 할머니의 존재는 안중에도 없었던 청년이 덥석 할머니의 손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할머니보다 반 발짝쯤만 앞장서서 횡단보도로 이끌어 줍니다. 할머니가 놀라 청년을 쳐다보았지만 잡힌 손을 뿌리치지는 않았습니다. 금방 청년에게 잡힌 손바닥에서 뜨끔한 열기가 전달됩니다.

청년의 배려가 몹시 고마워 횡단보도를 건너는 짧은 몇 초 동안 할머니는, 청년의 나이와 고향 그리고 기혼인가 미혼인가를 빠른 어조로 연거푸 물었습니다. 그러나 손자뻘의 청년에게서 코대답도 듣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무례하다고 나무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청년의 양쪽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 나오는 쿵쾅거리는 힙합 음악소리로 다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신호등이 바뀌기 전에 무사히 횡단보도를 건넌 두 사람은 다시 맞은편 길턱에 당도했습니다. 청년은 잡았던 할머니의 손을 미련 없이 놓아 줍니다. 그리고 할머니가 가야 할 방향과는 반대편 길로 수인사도 없이 끄덕끄덕 춤을 추듯 걸어갑니다.

할머니는 한숨을 돌리며 청년의 손에 의지했던 자신의 손바닥을 펴 봅니다. 작은 탄성이 할머니의 입에서 흘러나옵니다. 깡마르고 쇠약한 손바닥은 청년의 확장된 땀샘에서 쏟아져 나온 땀방울로 흠뻑 젖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날, 두 사람이 구성한 20초 동안의 조우와 동행은 같은 하늘 아래에서도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었던 두 세대가 보여 주는 절묘한 조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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