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創業-守成-更張의 나라경영 지금 무엇을 단행할 때이더냐”

  • 입력 2007년 9월 11일 03시 01분


《“수성이란 비록 평범한 임금과 자리만 채우는 신하라도 실패하지 않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수성은 쉽습니다. 그러나 경장이란 높은 식견과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습니다. 그만큼 경장은 어려운 것입니다. 수성을 해야 할 때인데 개혁에 힘쓰면 이는 병이 없는데 약을 먹는 격이어서 도리어 없던 병을 생기게 할 것입니다. 경장을 해야 할 때인데 준수하는 데만 힘쓰면 이는 병에 걸렸는데 약을 물리치고 누워서 죽기를 기다리는 격입니다.” (‘성학집요’ 중에서)

“임금의 마음이 흔들려서 조급해지고 편안하지 못할 때, 반드시 크게 간사한 무리들이 그 틈을 몰래 엿보고 임금의 마음을 따라 움직입니다. 그러다가 점차 교묘한 꾀를 써서 물기가 스며들듯 끼어 들어와 임금의 뜻과 영합함으로써 기쁘게 하기도 하고 겁을 주어 동요케 하여 현혹시키기도 하니, 임금의 마음이 점차 그들을 믿게 되어 술수에 빠지게 됩니다.”(‘만언봉사’ 중에서)》

율곡선생, 2007년 한국사회에 묻다

퇴계 이황의 주리론과 대비되는 주기론자로 조명되던 율곡 이이의 저술이 대중적 단행본으로 잇따라 번역되면서 현실주의 개혁사상가로 재조명되고 있다.

율곡이 1575년(선조 8년) 대학과 중용을 토대로 왕도정치에 입각한 정치개혁을 위한 통치학 교본으로 저술해 선조에게 바친 ‘성학집요’가 최근 단행본으로 출간됐다.

율곡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성학집요는 민족문화추진회의 ‘국역 율곡집’과 정신문화연구원의 ‘국역 율곡전서’에 포함돼 완역됐지만 학자들을 위한 텍스트에 머물렀다. 단행본으로 나왔던 을유문화사 판본은 절판됐고 풀빛 출판사의 판본은 청소년용 요약본이다. 이는 1568년(선조 1년) 퇴계가 10편의 그림에 담긴 성리학의 개요를 설파한 ‘성학십도’에 대한 각종 단행본이 10여 권에 이른다는 점과 대비된다.

이번에 나온 성학집요(청어람미디어)는 쉬운 우리말로 풀어 쓰고 친절한 각주 및 해설과 더불어 등장인물의 인명록까지 더해 독자들이 쉽게 읽을 수 있다.

이에 앞서 5월에는 1574년(선조 7년) 율곡이 선조에게 올린 장문의 상소문을 대중적으로 풀어 낸 ‘만언봉사, 목숨을 건 직설의 미학’(꿈이 있는 세상)도 출간됐다. 만언봉사(萬言封事)란 ‘누설되지 않도록 밀봉한 1만 자에 이르는 상소문’이란 뜻이다.

이 책들은 2005년 문고판으로 나온 ‘동호문답’(1569년 문답 형식으로 선조에게 올린 글·책세상)과 더불어 실용적 경세가로서 율곡의 면모를 유감없이 전달하고 있다.

성학집요 중 ‘위정(爲政)’편 ‘식시무(識時務)’에선 끊임없이 개혁이 호명되면서 개혁 피로감이 만연한 한국 사회에 일깨움을 주는 대목을 만날 수 있다. 율곡은 나라 경영의 근본은 “창업(創業)과 수성(守成), 경장(更張)이라는 세 가지뿐”이라고 못 박으며 이 셋은 시행의 시기가 달라야 하는데 창업의 시기에 경장을 하고, 경장의 시기에 수성을 하거나 수성의 시기에 경장을 하게 되면 나라의 경영이 뒤틀린다고 주장했다.

이를 대한민국에 적용할 경우 이승만-박정희 시기는 창업의 시기, 전두환-노태우 시기는 수성의 시기, 김영삼-김대중-노무현의 시기는 경장의 시기로 분류할 수 있다. 그렇다면 경장의 시기에 ‘역사 바로 세우기’ ‘제2의 건국’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했다는 역사관에 입각한 과거사 규명’과 같은 수사학은 과연 경장의 논리일까 창업의 논리일까. 한편 조선시대 최고의 상소문으로 꼽히는 만언봉사에선 “10년이 지나지 않아 재앙과 난리가 반드시 일어날 것”이라며 개혁의 시급함을 촉구하는 대목을 발견할 수 있다. 선조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18년 뒤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시대정신에 걸맞은 정책프로그램이 단행되지 못할 때 국가적 재난에 직면한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 주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왜 지금 율곡일까. 성학집요를 번역한 김태완 박사는 “형이상학적 깊이가 강조됐던 과거에는 퇴계가 부각됐다면 지금은 현실과 관련한 소통과 담론이 강조되며 실천적 지식인으로서 율곡이 부각되는 것 같다”고 답했다.

만언봉사를 번역한 강세구 박사는 “과거 체제 변혁적 지식인의 모델로서 18세기 실학자를 주목했다면 지금은 체제 내 개혁을 모색했던 지식인의 모델로 율곡이 주목받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 시대가 요구하는 시대정신의 일단을 읽을 수 있는 현상이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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