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80년 최규하 대통령 하야

  • 입력 2007년 8월 16일 03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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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8월 16일 오전 최규하 대통령은 침통한 표정으로 청와대 영빈관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TV 카메라 앞에서 무겁게 입을 뗐다.

“오늘 제10대 대통령 직에서 물러나겠습니다.”

임기를 만 8개월도 못 채운 대한민국의 최단명 대통령이 된 것이다.

그는 성공한 외교관이었으나 불운한 대통령이었다. 1946년 중앙식량행정처 기획과장으로 공직에 발을 들여놓은 그는 뛰어난 영어 실력 덕에 외무부로 옮겨 주일대표부 총영사, 외무차관, 외무부 장관 등 착실하게 승진했다. 무색무취했지만 능력 있고 공평무사한 외교관으로 평가받아 1975년 김종필 씨에 이어 국무총리까지 올랐다.

그는 1979년 10·26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숨지자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고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의 선거를 통해 제10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는 사실상 정권을 장악한 신군부에 눌려 허수아비 대통령에 불과했다. 12·12쿠데타와 5·18민주화운동 등 험난한 현대사의 중심에 서 있었지만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는 대통령 취임 당시 “1년 안에 국민이 원하는 헌법을 만들어 대통령 선거와 총선을 치른 뒤 물러나겠다”고 밝혔고 이후에도 이를 누차 강조했다.

하지만 신군부 쪽에서 볼 때 그는 마지막 남은 정치적 걸림돌에 불과했다. 최 대통령이 밝힌 일정을 기다릴 이유가 없었다. 그의 하야가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신군부의 강한 압박을 더는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역사적 역할은 오히려 퇴임 후에 부각됐다. 정권이 바뀐 뒤 열린 1987년 5공 청문회와 1996년 12·12 및 5·18 재판 당시 그의 입에 모든 국민의 관심이 쏠렸다. 12·12사태 당시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체포하기 위해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최 대통령의 재가를 받던 상황과 5·17 전국계엄확대와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군의 발포 명령 등 신군부의 불법 행위를 밝히기 위해 그의 증언이 중요한 관건이었지만 그는 끝내 입을 다물었다.

그는 지난해 10월 비밀을 간직한 채 8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세간에선 사후에 비망록이 나올 것이라고 점쳤지만 지금까지 나온 것은 없다.

그는 12·12 및 5·18 재판 당시 재판정에 출석해 “재임 중 수행한 국정행위에 대해 훗날 법정에 와서 증언하거나 소명하는 것은 국가 경영상 곤란하다”며 “전직 대통령의 증언은 국가원수라는 직위의 위엄을 모독하는 행위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역사의 진실과 국가원수의 존엄 중 어느 쪽이 더 가치가 있는 것이었을까.

서정보 기자 suh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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