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자비]마지막에 동행할 친구

  • 입력 2007년 6월 14일 03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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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무드에 보면 세 친구 이야기가 나온다.

어느 날 임금이 사자(使者)를 보내어 어떤 사나이에게 곧 출두하라고 명령을 했다. 그 사람에게는 세 사람의 친구가 있었다. 첫 친구는 대단히 우정이 깊어 항상 진정한 친구라고 생각했다. 두 번째 친구는 친하긴 했지만 첫째 친구보다는 못하다는 생각을 했다. 세 번째 친구는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평소에 별반 관심을 갖지 않았던 사이였다.

임금의 사자가 왔을 때, 그는 겁도 나고 불안했다. 그래서 친구와 함께 가기로 마음을 먹고 첫째 친구에게 가서 동행을 청했다. 그러나 이 친구는 별다른 이유도 없이 단호히 거절했다. 할 수 없이 두 번째 친구에게 부탁했다. 이 친구는 대궐 문 앞까지만 가겠다고 대답했다. 풀이 죽은 그는 할 수 없이 세 번째 친구에게 부탁했다. 그러자 세 번째 친구는 뜻밖에도 기쁘게 응하면서 임금에게 잘 말해 주겠다고 했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임금은 하나님을 가리키고, 대궐로의 부름은 죽음을 비유하는 것이다. 즉 인간이 이 땅에서 생명이 끝나 하나님 앞에 설 때 어떤 친구가 동행할 수 있는가를 보여 주는 교훈적인 우화다.

그 사람이 가장 사랑하는 첫째 친구는 돈이다. 서양 속담에 ‘수의에는 호주머니가 없다’고 했다. 돈은 결코 가져갈 수 없다.

둘째 친구는 친척이다. 사람이 죽으면 친척들은 대궐 문 앞인 무덤까지만 같이 간다. 셋째 친구는 선행이다. 평소에 눈에 띄지 않지만 죽은 뒤에도 늘 그와 함께 있는 것이다. 이 친구는 우리가 이 땅의 삶을 끝내고 심판대 앞에 설 때까지 함께한다.

이 친구의 증언에 따라 하나님 앞에 칭찬과 상급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계14:13).

최후에 남는 것은 돈도, 친척도 아니고 이 땅에서 행한 ‘선한 삶’이다. 그런데 우리는 없어질 친구들에게 너무 집착한다. 첫째 친구에게만 관심을 두고, 이 친구만 있으면 좋아하고, 이 친구를 위해서 살고, 이 친구 때문에 싸우고 원수가 되곤 한다.

내가 죽을 때 유일하게 동행할 수 있는 셋째 친구, 즉 ‘선한 삶’이 우리 인생의 진정한 친구가 돼야 하지 않을까. 특별히 오늘날의 교회와 성도에겐 더더욱 그렇다.

김경원 서울서현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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