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890년 양화진 외국인묘역 허가

  • 입력 2007년 6월 13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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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천 번의 삶이 주어진다 해도 그 모두를 한국에 바치리라.”(루비 켄드릭)

해질녘 서울 마포구 양화진에 있는 외국인 묘역을 찾아본 일이 있는가. 그곳은 한국을 사랑했던 푸른 눈의 이방인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유럽의 도시를 걷다 보면 베토벤, 피카소, 모파상, 보들레르 같은 유명 인물들이 묻혀 있는 호젓한 묘지를 만날 수 있다. 이국적인 정취가 물씬 풍기는 양화진 외국인 묘역은 요즘 젊은이들의 데이트 장소로도 인기를 끌고 있다.

이곳에는 17개국 575명의 외국인이 잠들어 있다. 격동기 우리나라를 위해 많은 일을 했던 사회사업가들과 교육자, 독립운동가, 선교사들이 대부분이다. 대한제국 말기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고 배일 운동을 펼쳤던 베델, 연희전문학교를 설립한 언더우드 일가, 이화학당(현 이화여대)을 설립한 메리 스크랜턴, ‘크리스마스 실’의 창시자로 한국에서 결핵퇴치 운동에 앞장섰던 셔우드 홀, 배재학당을 창설한 아펜젤러 등 역사교과서에 나오는 인물도 많다. 1907년 헤이그 밀사로 파견됐던 헐버트 박사의 묘에는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기보다 한국에 묻히기를 원하노라”라는 말이 적혀 있다.

이 묘역이 조성된 것은 미국 장로교의 의료선교사로 고종의 시의(侍醫)로 활동했던 존 헤론이 1890년 전염성 이질로 사망한 것이 계기가 됐다. 이전까지 외국인들은 1883년 인천항 해안 언덕에 마련된 묘지에 묻혔다. 정부는 미국 공사 앨런과 2, 3일 심사숙고한 끝에 1890년 6월 13일 도성 외곽 한강변에 묘지 설립을 허가해 줬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이후 친한(親韓) 외국인이 묻혀 있는 이 묘역은 외면당했으며, 6·25전쟁 때는 이 부근이 격전지가 되는 바람에 묘지석에 총탄자국도 남아 있다. 1976년 서울시는 ‘제2한강교 진입로 및 전철 2호선 공사계획’을 위해 묘지 이전계획을 발표함으로써 역사의 현장에서 사라질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시민들의 반대로 이전계획은 무산됐다.

양화진은 예부터 경치가 아름다워 중국 사신들을 접대하거나, 왕족의 별장이 있던 곳이었다. 또한 대한제국 말기 로즈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함대가 정박하며 무력시위를 한 장소이며, 대원군의 병인박해 때 천주교 신자의 목을 자르는 수난의 현장으로 ‘절두산(切頭山)’으로 불리기도 했다. 양화진은 우리나라 기독교의 선교역사가 담긴 순례지일 뿐 아니라 격동의 역사를 느낄 수 있는 현장이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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