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경영]‘칼리 피오리나-힘든 선택들’

  • 입력 2006년 11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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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 피오리나-힘든 선택들/칼리 피오리나 지음·공경희 옮김·417쪽·1만5000원·해냄

이 책에 따르면 그녀는 전형적인 ‘헛똑똑이’였다. 그녀는 미국의 명문 스탠퍼드대에 입학했지만 자신이 무엇을 잘하는지, 뭘 하고 싶은지를 몰랐다. 법학대학원에 들어간 것도 그저 부모를 기쁘게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이었다. 결국 대학원을 중퇴한 뒤엔 타이프라이터를 치는 비서직이나 부동산중개업체의 안내원에도 만족했다. 사랑하는 남자를 따라 이탈리아행을 감행할 정도로 장래에 대한 계획 같은 것도 없었다. 1980년 26세의 나이에 미국 최대 통신업체 AT&T 영업직으로 입사했지만 자신이 그 직장을 계속 다닐지조차 확신이 없었다. 단, 그녀에겐 ‘자신의 손으로 변화를 이뤄 내는 즐거움’으로서의 비즈니스에 대한 열정이 있었다.

미국 포천지가 선정한 ‘가장 영향력 있는 미국 여성 기업인 50’에서 6년 연속 1위를 차지했던 칼리 피오리나(52) 전 HP 회장이 보여 준 젊은 날의 자화상이다.

지난달 미국에서 출간된 이 책이 화제가 됐던 가장 큰 이유는 ‘세계 최고의 여성 기업인’의 자서전이라서가 아니었다. 한때 세계 최고였다가 지난해 실적 부진을 이유로 HP 이사회에 의해 사실상 축출된 뒤 그가 펼치는 복수의 ‘무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 이 책의 후반 3분의 1은 HP의 최고경영자(CEO)로 재직했던 5년여에 집중돼 있다. 언제부터인가 실리콘밸리의 ‘반백의 할머니’로 불리게 된 HP의 문제점과 CEO 취임 이후 이를 개선하기 위해 어떤 일을 펼쳤고, 어떻게 좌절했는가 하는.

그러나 우리에게 이 책은 그런 비즈니스 업계의 이면보다는 한 젊은 직장여성이 어떻게 성공의 사다리를 밟고 세계 최고가 됐는가에 대한 전반부 내용으로 더욱 다가온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세일즈맨의 성공담을 그린 일본 만화 ‘시마 과장’의 여성판으로 볼 수도 있다.

핵심 고객을 만나는 장소가 스트립바로 바뀌었으니 빠지라는 말을 들었을 때, 동료나 상사를 설득하기 위해 나간 저녁 자리가 유혹의 자리로 돌변했을 때, 상사가 자신을 ‘얼굴 마담’이라고 소개할 때, 고위직 인사가 성차별적 발언이나 성적 농담을 늘어놓을 때, 상사나 동료가 위압적 자세로 고함을 치거나 뒤에서 날조된 험담을 퍼뜨릴 때….

대부분의 여성들이 직장생활에서 수치심을 느끼거나 눈물을 감출 수 없는 이런 상황에서 피오리나는 말보다는 과감한 행동으로 남성들을 무릎 꿇게 만들었다. 그는 단단히 무장한 정장 차림으로 스트립댄서를 무력화하고, 몇 시간에 걸쳐 고객을 설득했으며, 동료의 호의가 다른 목적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과감하게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또 상사의 언행이 자신의 존엄성을 침해한다고 느꼈을 때는 단호하게 문제를 제기했으며, 상대가 ‘힘의 언어’를 들고 나오면 같은 ‘힘의 언어’로 그들을 굴복시켰다. 어린 시절 동경했던 TV 시리즈 ‘미션 임파서블’의 여자 스파이 시나몬처럼 그는 여성인 자신을 얕잡아 보고 덤벼드는 남자들의 약점을 놓치지 않고 받아쳤다.

그것은 그가 남자들보다 똑똑해서가 아니었다. 성공을 위해서 ‘사람의 가치는 직위나 직책이 아니라, 됨됨이와 본인이 그것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신념을 맞바꾸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난 그때까지 사랑을 받으려고 열심히 노력했다. 누구나 사랑받고 싶어 하지만, 특히 여성들은 상대에게 유쾌하고 붙임성 있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고 싶어 한다. 그날 나는 가끔은 사랑받는 것보다 존중받는 게 더 중요하다고 결론지었다.”

자신의 영혼을 지켜야 한다는 이 신념이 성공의 방패였다면 그 칼은 쉬운 자리보다는 언제나 어려운 자리를 찾아가는 도전정신과 조직원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열정을 불어넣으면서도 자신은 냉정을 지킬 줄 아는 균형감각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발견하게 되는 그의 또 다른 재능은 핵심을 찌르면서도 상대방을 배려하는, 솔직 담백하면서도 외교적인 화술이다. 그는 자신이 정 많고 여린 여성임을 부각하면서도 오만하고 어리석을 뿐 아니라 타락한 남성들이 지배하는 세상에 맞서 싸운 잔 다르크와 같은 존재임을 효과적으로 보여 준다. 이 책이 피오리나 개인의 편견에 의존하고 있다고 누구나 의식하면서도 책을 읽는 동안 저자와 혼연일체가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비즈니스란 단순한 수치가 아니라 사람에 대한 것’이라고 역설하는 CEO 피오리나의 진짜 무기가 아닐까. 원제 ‘Tough Choices by Carly Fiorina’(2006년).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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